"5년 내 공학에 상상 못한 기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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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내 공학에 상상 못한 기회 온다"

나스닥시장 시가총액 상위 8개사 중 7곳은 최고경영자(CEO)가 모두 공대 출신이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는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의 대학 전공은 컴퓨터공학이다. 전문경영인인 알파벳의 순다르 피차이와 애플의 팀 쿡도 각각 대학에서 금속공학, 산업공학을 배웠다.

"5년 내 공학에 상상 못한 기회 온다"

중국은 더하다. 영어교사 출신인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를 제외하고, 상하이 증시 시총 상위 10개사(민영기업 기준)의 CEO 대부분이 이공계 출신이다.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난방공조), 마화텅 텐센트 회장(컴퓨터공학), 리옌훙 바이두 회장(컴퓨터과학), 왕싱 메이퇀 회장(전자공학), 레이쥔 샤오미 회장(컴퓨터공학), 쩡위췬 CATL 회장(해양공학), 왕촨푸 BYD 회장(금속재료공학) 등이 중국을 대표하는 공학 전공 기업인이다. 글로벌 테크산업을 양분한 미·중의 경쟁력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례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한국의 대표 기업 역시 1980~1990년대 대학에 다닌 ‘공학 청년’의 열정에 힘입어 세계적인 기업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공학 기업인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의대 광풍’만으로는 테크 전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서다. 한국경제신문은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서울대 공대 출신 CEO 16명을 약 4개월에 걸쳐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은 공학에 전례 없는 기회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앞으로 5~10년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것보다 훨씬 큰 혁신이 나올 것”이라고 했고, 삼성전자 CEO 출신인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세계적 명성을 얻으려면 공대에 도전해야 한다”고 했다.

이석희 SK온 사장도 “학생들이 본받을 만한 롤모델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경계현 삼성전자 고문은 “한국 공학교육이 여태 1980년대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쓴소리도 쏟아졌다.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은 “국가 리더의 배경이 지나치게 법대에 쏠려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인 영웅대접에 박한 韓, 글로벌 테크 전쟁서 생존 어렵다"
"韓 반기업 정서·롤모델 부재 심각"…인재육성 핵심은 '보상체계 개편'

공대 출신 최고경영자(CEO)들이 주창하는 ‘인재보국론’의 핵심은 공학이 다시 국가 성장의 중심축이 돼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기계공학 75학번인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지금 우리 사회엔 중국의 원사(院士) 같은 공학 영웅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자공학 82학번인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의대로 쏠리는 것을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왜 공학이 매력을 잃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기업도 보상체계 바꿀 시점

CEO들은 반기업 정서와 롤모델 부재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입을 모았다. 신 부회장은 “중국은 딥시크 창업자인 량원펑 등 스타트업에서 탄생한 기업인을 영웅으로 대접해 준다”며 “우리도 사회 전체에 공학이 존중받는 풍토를 조성해야 인재가 모인다”고 강조했다. 금속공학 72학번인 권오준 전 포스코 회장은 중국의 최고 과학자를 일컫는 ‘원사 제도’를 예로 들었다. 그는 “중국은 국가가 기술·과학 분야 최고 인재를 소수로 뽑아 평생 급여, 사무실, 비서, 연금까지 보장하고 사회적 명예를 부여한다”며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도 기술 인재만큼은 자본주의적 보상 논리로 움직이는데 한국은 노조 반발과 정치적 고려로 제도를 못 키운다”고 직격했다.

무기재료공학 84학번인 이석희 SK온 사장은 “위인전에 나오는 과학자와 의사처럼 공학 분야에서도 롤모델이 필요하다”며 “나를 공학계로 이끈 롤모델은 진대제 박사였다”고 회상했다. 이 사장은 “과거 삼성전자에서 진 박사가 마스크를 쓰고 제품을 개발하는 사진을 전면 광고로 내보내는 등 삼성의 대표 인물로 연구원을 전면에 내세웠다”며 “그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진 박사처럼 되고 싶어 반도체 분야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화학공학 89학번인 이준혁 동진쎄미켐 회장은 여전히 공학인이 존중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성공하면 박수를 쳐주는데 이상하게 기업인이 이윤을 내면 비판받는다”며 “그런 분위기가 바뀌어야 젊은이들이 공대에 지원할 것”이라고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기업 내 보상체계 개편이 인재 육성의 핵심이라는 데에도 공감대가 형성됐다. 권오준 전 회장은 “능력이 증명된 소수에게는 두세 배, 많으면 열 배까지 주는 보상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석희 사장은 “공채로 뽑고, 중앙에서 일방적으로 각 부서에 뿌려주는 인재 할당 방식에서 벗어나 직무에 맞춰 각 부서가 인력을 뽑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인사 시스템은 ‘형평성’이라는 단어에 갇혀 있다”며 “직무 가치에 따른 보상 차등화 없이는 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컴퓨터공학 97학번으로 미국에서 창업해 유니콘 기업 반열에 오른 인공지능(AI) 광고 스타트업 몰로코의 안익진 대표는 “보상체계가 가장 잘돼 있는 국가가 중국”이라며 “알리바바가 상장했을 때 부자 엔지니어가 속출하면서 본사가 있는 항저우의 집값이 요동쳤을 정도”라고 전했다.

◇ 창업 실패해도 재기할 기회 줘야

공학도에게 기회의 문을 넓혀주려면 창업 생태계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쏟아졌다. 제어계측공학과 82학번인 경계현 삼성전자 전 사장(DS부문장)은 국내 벤처 생태계를 ‘대부업 구조’라고 비판했다. 그는 “한국 벤처캐피털(VC)은 기업을 키우기보다 단기 회수에 급급하다”며 “싱가포르 테마섹 같은 장기 투자 리더십을 정부가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석희 사장은 창업 실패가 곧 신용불량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제도 환경을 지적했다. 그는 “중국 대학 졸업생 15%가 창업하고, 대부분 실패하지만 신불자로 전락하지는 않는다”며 “실패를 흡수하는 생태계가 한국엔 없다”고 꼬집었다.

이준혁 회장은 문제의 뿌리를 교육체계에서 찾았다. 이 회장은 “수학을 모르니까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수학을 포기한 국가에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강경주/박의명/김채연/김진원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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