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과학자는 종종 거대한 화면 앞에서 인류를 구할 치료제를 단숨에 찾아낸다.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하나의 신약이 환자에게 도달하기까지는 평균 10년 이상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 수많은 실패가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이 긴 여정에 새로운 조력자가 등장했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AI 신약 개발은 수많은 약물 후보 중 가능성이 높은 물질을 컴퓨터가 먼저 골라주는 기술이다. 예전에는 연구자가 도서관 책장을 하나하나 뒤지듯 후보물질을 찾았다면, 이제는 AI가 방대한 논문, 유전체 정보, 단백질 구조, 약물 반응 데이터를 빠르게 읽고 “이 물질이 이 질병에 맞을 가능성이 크다”고 제안한다. 마치 내비게이션이 막히는 길을 피해 빠른 길을 알려주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AI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마법사는 아니다. 컴퓨터 속 결과가 실제 생명 현상과 맞는지는 반드시 실험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웻 랩(wet lab)’과의 연결이다. AI가 후보를 찾으면 이 후보군을 활용해 세포·마우스·휴먼 오가노이드·영장류·독성시험 등 실제 실험을 거쳐 답을 검증해야 한다. AI 신약 개발의 성공은 ‘좋은 알고리즘’이 ‘좋은 실험 인프라’와 만날 때 가능하다.
최근 정부도 이런 흐름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K-멜로디는 여러 기관의 민감한 데이터를 한곳에 모으지 않고도 AI를 학습시키는 ‘연합 학습’ 기반 신약 개발 플랫폼을 지향한다. 각 제약사의 데이터를 보호하면서도 더 똑똑한 AI 모델을 개발할 수 있는 방식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K-AI 신약 개발 전임상·임상 모델개발 사업을 통해 AI를 활용해 전임상 데이터와 임상시험 설계를 연결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해 의약품 안전성·유효성·품질 판단에 활용되는 AI 모델에 대해 사용 목적과 위험도에 맞춘 신뢰성 평가 틀을 제시했다. 유럽의약품청(EMA)도 신약 발견부터 전임상, 임상, 제조, 허가 후 안전관리까지 의약품 전주기에서 AI 활용 원칙을 논의하고 있다.
앞으로 핵심은 AI와 생명 현상 간 간극을 줄이는 것이다. 데이터만을 기반으로 하는 AI로는 한계가 있다. 생명체는 복잡하고, 같은 약도 세포 종류와 장기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기전 기반의 ‘AI 가상세포’가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가상세포는 세포 안에서 유전자, 단백질, 대사경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컴퓨터 속에 재현하려는 시도다. 휴먼 오가노이드와 미세생리 시스템 같은 첨단 대체 시험법도 결합해야 한다. 작은 장기처럼 만든 오가노이드에서 약물 반응을 보고, 장기 칩에서 혈류와 조직 환경을 모사하며 바이오 반도체 기술로 세포의 미세 신호까지 읽어내면 AI가 학습할 데이터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국가전임상시험지원센터의 역할도 여기에 있다. 세포, 소동물, 휴먼 오가노이드, 영장류, 독성 평가로 이어지는 첨단 전임상 원스톱 플랫폼은 AI가 제안한 후보물질을 실제 신약 후보로 성숙시키는 검증 무대가 될 수 있다. AI가 가능성을 말한다면, 전임상 인프라는 근거를 마련한다. AI 신약 개발은 컴퓨터가 약을 대신 제조하는 시대가 아니다. 사람, 데이터, 실험, 규제가 함께 연결되는 새로운 신약 개발 방식이다. 드라이 랩과 웻 랩이 서로를 보완하고, AI와 전임상 플랫폼이 하나의 생태계로 움직일 때 한국 바이오는 추격자가 아니라 설계자가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의 과장이 아니라, 기술을 현실의 치료제로 바꾸는 연결의 힘이다.

1 week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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