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니아 폰타나의 ‘비앙카 델리 우틸리 마셀리와 자녀들의 초상’(1604∼1605년·사진)은 17세기 초 로마 귀족 가족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비앙카는 무려 열아홉 명의 자녀를 낳은 귀족 여성으로, 여기 묘사된 여섯 명은 1605년까지 살아남은 자녀들이다. 비앙카는 37세 때 마지막 출산 중 사망했다.
그림 속 아이들이 손에 든 무화과 그릇, 깃펜, 잉크병 등의 소품들은 풍요와 번영, 학문 등 가문의 미덕을 암시한다. 막내딸은 엄마 손에 들려진 강아지의 발을 잡고 있는데, 이는 충성과 순종을 의미한다.
그림에서 가장 강렬한 건 엄마의 진지한 표정이다. 부귀를 상징하는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 너머로, 계속된 출산과 상실을 견디며 아이들을 지켜내려는 단단한 모성애가 읽힌다.흥미롭게도 이 그림을 그린 폰타나 역시 열한 명의 자녀를 낳은 엄마였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여성 화가 중 한 명으로, 화가 남편을 만나 결혼한 후에도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가사노동 면제를 명시한 혼인 계약서를 직접 작성했다. 당시 여성에게 결혼은 곧 경력의 끝을 의미했기에 이는 매우 혁명적인 조치였다. 실제로도 폰타나의 남편은 자신의 일을 내려놓고 능력 있는 아내의 조수를 자처하며 살았다.
이렇게 이 초상화에선 두 여성의 삶이 나란히 겹친다.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며 가문의 대를 잇고 지킨 비앙카, 그 요구를 거슬러 자신의 길을 개척한 폰타나.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두 여성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시대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맞설 것인가.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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