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찾아온 맑음[이준식의 한시 한수]〈378〉

2 weeks ago 12

깊은 거처에서 성곽을 굽어보니, 봄 가고 여름인데도 맑고 서늘하다.하늘은 그늘진 풀을 가엾이 여기고, 세상은 늦게 갠 하늘을 더욱 귀히 여기네.높은 누각 또한 한층 아득해 보이고, 작은 창엔 은은한 저녁빛 스며드네.남방의 새는 젖었던 둥지가 다 마르자, 돌아가는 날갯짓이 한결 가볍구나.(深居俯夾城, 春去夏猶淸. 天意憐幽草, 人間重晩晴.幷添高閣迥, 微注小窓明. 越鳥巢乾後, 歸飛體更輕.)―‘늦게 갠 하늘(만청·晚晴)’ 이상은(李商隱·812∼858)긴 장마 끝의 햇빛은 평소와 다르다. 늘 있던 빛인데도 새삼 반갑고, 축축하던 풀잎이 반짝이는 모습까지 눈에 들어온다. 이상은은 바로 그런 순간을 붙잡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하늘은 그늘진 풀을 가엾이 여긴다’는 구절이다. 오랜 비에 젖은 외진 곳의 풀이 저녁 햇살을 받는다. 시인은 그 변화를 지나치지 않았다. 오랫동안 불운과 정치적 갈등에 시달렸던 자신의 처지가 그 풀과 겹쳐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늦게 갠 하늘’은 단순한 날씨가 아니다. 오래 흐렸기에 귀해진 맑음이다. 창으로 저녁빛이 스며들고, 젖었던 둥지는 마르며, 돌아가는 새의 날갯짓도 가벼워진다. 달라진 것은 몇 줄기 햇빛뿐인데, 세상을 보는 마음은 전과 같지 않다. 삶의 문제도 한꺼번에 걷히지는 않는다. 다만 오래 내리던 비가 문득 그치듯, 뜻밖의 평온이 잠시 찾아올 때가 있다. 그 순간까지 짧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늦게 찾아온 맑음은 그냥 맑음이 아니다. 오래 흐린 날을 견딘 사람만이 알아보는 빛이다. 이준식의 한시 한 수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만화 그리는 의사들 공기업 감동경영 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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