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스테이블코인과 쥬라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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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스테이블코인과 쥬라기공원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를 둘러싼 움직임을 보면 영화 ‘쥬라기공원’이 떠오른다.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공룡 앞에서 주인공들이 공포를 느끼자, 공원 주인은 이중·삼중 안전장치를 갖췄고 번식 능력도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명체는 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결국 공룡들은 울타리를 부수고 뛰쳐나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되고 만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우리 밖을 활보하는 ‘야생 공룡’에 가깝다. 시장 점유율 1위인 테더는 엘살바도르에 법인을 둔 역외 법인이며 테더가 발행하는 USDT는 이미 각국의 규제를 벗어나 있다. 블록체인 기반이어서 외환 규제를 피해 국경을 넘나들며 까다로운 신원 확인을 하는 은행 계좌도 필요 없다. 베네수엘라처럼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국가의 달러 수요를 충족해주는 유용한 수단이다. 가장자산 거래의 규제 회피용으로도 널리 쓰인다. 현재 한국의 거래소는 가상자산 파생상품 거래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이를 피해 해외 거래소로 자금을 보낼 때도 외국환거래법 적용을 받지 않는 USDT가 인기다.

달러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미국에 USDT는 골칫거리다. 기존 달러 결제망(CHIPS/SWIFT)은 미국이 자금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블록체인의 익명성은 이를 무력화한다. 러시아 석유업자들이 원유 대금을 USDT로 받는다는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금융제재를 우회하는 통로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 트럼프 정부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법안인 ‘지니어스(GENIUS)법’을 통과시켰다. 골칫거리인 스테이블코인을 왜 법제화하려 할까? 이미 거대해진 테더라는 ‘야생 공룡’을 길들이기 위해서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수백조원 규모가 존재하고 있다. 거대한 육식공룡들이 공원 밖을 뛰어다니고 있는 셈이다. 엘살바도르 법인인 테더는 준비자산에 대한 불투명성 속에 미국 법망 밖에서 영업하고 있다. 지니어스법안은 미국 규제를 따르지 않는 스테이블코인은 3년 내 시장에서 퇴출하도록 했다. 일부에서는 미국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채권 수요 유도라는 시각도 있으나 채권 수요 효과는 제한적이다.

여기에 미국 정치권의 이해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트럼프 일가와 미국 정부 인사들이 가상자산 사업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크립토 기업들은 미국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로비자금을 쓰고 있는데, 일종의 합법적 뇌물 제도인 미국 로비 제도하에서 미국 정치인들이 크립토산업의 정치적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제도화를 따라가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미국과 다르다. 미국은 야생 공룡이 활보하는 쥬라기공원이라면, 한국은 이제 막 알에서 부화시키려는 단계다. 법안을 아무리 잘 설계하더라도 경제라는 생명체는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반응하기에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모른다. 의도치 않은 결과가 뒤따를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외환거래 문제다. 현행법상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지급수단으로 인정되지 않아 외국환거래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자본 유출, 불법 외환 송금, 돈세탁 가능성에 사실상 문이 열려 있는 셈이다. 한국형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의 핵심은 원화 스테이블코인보다 오히려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있다.

둘째는 불법 송금 및 돈세탁 방지를 위한 장치 마련이다. 테더가 사용하는 비허가형 퍼블릭 체인은 자금 흐름을 따라갈 수는 있으나 익명성이 높아 신원 파악이 어렵다. 발행자가 지갑을 동결시키거나 코인을 소각하는 기능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대안으로 누구나 지갑을 만들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신원이 확인된 이용자들에게만 지갑을 열어주는 ‘화이트리스트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한국에는 아직 테더와 같은 야생 공룡이 없다. 이제 막 설계하고 부화시키려 하는 단계다. 한국 상황에 맞는 제도 설계가 중요한 시점이다. 섣부른 모방보다는 시장의 특성과 위험 요소를 면밀히 검토해 균형 잡힌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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