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산업의 속도, 정치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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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산업의 속도, 정치의 속도

2023년 정치부에서 취재할 때 얘기다. 어느 날 중진 국회의원과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면서 당혹감을 느꼈다. 그가 쓰는 단어가 10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하나도 바뀌지 않아서다. 계파, 원조 측근, 공천, 배신자, 정치보복…. 그의 발언 속 등장인물도 마찬가지였다. 절반 이상은 그대로였다. 당혹감은 정치 분야를 취재한 지난 3년 내내 이어졌다. 정치인들은 수틀리면 회의장을 우르르 빠져나가고, 툭하면 상대를 향해 삿대질했다. 질문해놓고 답변을 듣지 않는 모습도 여전했다. 하루는 상대 정당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또 하루는 같은 정당의 다른 계파를 비난하는 행태도 반복됐다. 그들이 내놓는 주장, 그들이 발의하는 법안도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용어부터 규모까지 확 바뀐 산업계

정치판을 떠나 지난달 산업 취재 담당으로 옮긴 후에 느낀 감정 역시 당혹감이었다. 정치와 반대로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다. 익숙하지 않은 용어가 난무했다.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베이스 다이, 실리콘 포토닉스, 쿼드레벨셀(QLC)…. 신문 기사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기본적인 반도체 용어들이다. 자동차산업을 봐도 그렇다.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 주행거리연장형 전기차(EREV) 등 몇 년 전까지 없던 단어들이 등장했다. 5년 전 신기술은 진작 구식 기술이 됐다.

기업이 발표하는 수치의 규모도 달라졌다. 2020년 35조원 규모 이익을 낸 삼성전자는 올해 연간 영업이익 300조원을 바라보고 있다. 수천억원 규모 수주를 따낸 후 거창한 보도자료를 내던 조선업체들은 이제 1조원 규모 수주에 성공해도 무덤덤하다. 한국 기업인이 젠슨 황, 리사 수, 샘 올트먼, 순다르 피차이 등 글로벌 ‘빅 샷’과 만나는 것도 흔한 뉴스가 됐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가 D램을 장기 공급받기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러브콜을 보내는 장면도 이젠 익숙해졌다.

산업 발목잡는 정치는 그대로

1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정치와 5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모든 게 바뀌는 산업만큼 당혹스러운 게 또 있다. 기업을 대하는 정치의 태도다. 10년 넘도록 그대로다. 대통령이 연일 기업들이 뛸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공개 발언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국회의원들은 툭하면 기업을 옥죄는 법안을 내놓고 있다. 당장 여당은 전체 산업계를 대상으로 한 집단소송법을 처리하겠다고 나섰다. 22대 국회에서 기업 규모가 커졌다는 이유로 규제를 늘리는 법안이 149개 더 발의됐다고 한다. 일부 정치인은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를 자신의 지역구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수시로 기업인들을 국회로 부르는 행태도 여전하다. 해마다 열리는 국정감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여당은 지난달 중동사태 관련 긴급 간담회라는 명목으로 10명이 넘는 기업인을 불렀다. 간담회는 90분 정도 진행됐는데, 정작 30분은 의원들의 ‘인사말’에 할애됐다.

한국 정치판은 변함이 없지만, 기업들은 빠른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뒤처지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정치가 기업만큼 빠르게 변화하길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다만 정치가 생존 경쟁을 위해 뛰고 있는 기업들이 덜 고단하도록 ‘조금이라도’ 돕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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