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과 보존은 본질적으로 충돌하기 쉬운 가치다. 현대 도시에선 더욱 그렇다. 고밀도 개발을 통해 공간 이용의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경제적 요구와 문화유산, 자연환경을 보존하려는 공공적 요구는 양립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 도심의 세운 4구역 재개발을 놓고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가 대립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서울시는 낙후된 세운상가 일대를 전면 재정비해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을 복원하고, 고층 랜드마크 건립을 통해 침체된 도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문체부는 사업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의 정전에서 바라보는 역사적 경관을 훼손할 우려가 있어 새로 지어질 건물의 높이를 하향 조정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특별한 희생' 강요 안 돼
답답한 교착상태를 타개할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상기할 만한 두 개의 역사적 판결이 있다. 첫 번째는 1998년 12월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이다. 당시 헌재는 “재산권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린벨트 제도가 합헌이라고 결정하면서도 중요한 단서를 달았다. 공익을 위한 규제라도 개인에게 감내할 수 없는 ‘특별한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가는 반드시 금전적 보상을 하거나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원칙을 세운 4구역에 적용해보자. 이 지역은 2004년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됐지만 종묘 경관 보호를 위한 고도제한 규제에 막혀 20년 넘게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조합원들이 겪은 재산상 손실과 정신적 고통은 ‘특별한 희생’의 한계를 넘어섰다. 공공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개인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구조는 지속 불가능하다.
제 3의 대안은 없나
조합원들 입장에선 서울시 계획대로 고층 재개발이 이뤄지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정부의 반대가 워낙 강경해 ‘제3의 대안’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때 참조할 만한 사례가 1978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이다. 당시 뉴욕의 유서 깊은 그랜드센트럴터미널을 소유한 철도회사가 역사(驛舍) 위에 50층 높이 타워를 짓겠다고 하자 뉴욕시는 랜드마크 보존법을 들어 불허했다. 회사 측은 사유재산 침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대법원은 뉴욕시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뉴욕시가 제시한 ‘기발한 해결책’을 인정했다. 바로 건물을 높게 짓지 못해 ‘침해된 권리’(공중권)를 인근의 다른 건물주에게 팔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판결로 ‘개발권 양도제’가 현대 도시계획의 핵심 수단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세운 4구역에도 개발권 양도제를 적용하면 어떨까. 종묘 앞이라서 건물을 높게 올릴 수 없다면 그 억눌린 용적률(개발권)을 떼어내 고밀도 개발이 필요한 다른 지역에 팔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것이다. 보존 가치가 있는 땅의 규제는 유지하되 그로 인한 손실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보전해주는 방식이다. 이는 재정 투입 없이도 개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도시의 역사성도 지키는 ‘윈윈’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서울시는 오래전부터 ‘용적이양제’라는 한국형 개발권 양도제 도입을 준비해왔다. 이제는 만지작거리던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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