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최태원 SK 회장의 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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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최태원 SK 회장의 깁스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처음 마주한 건 2023년 7월 제주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그와 만찬 테이블에서 20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막힘 없는 그의 발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당시 고대역폭메모리(HBM)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SK하이닉스에 대한 평가다. “수학 한 과목(HBM)은 잘했는데, 그렇다고 전교 1등(메모리 1위)은 아니잖아요.” 자신감과 자만에 대한 경계심이 함께 묻어 있는 솔직한 발언에 ‘열려 있는 재벌 총수’란 생각이 들었다.

은둔 대신 활발한 대외활동

약 3년 전 최 회장과의 만남을 떠올린 건 그의 활발한 대외 행보 때문이다. 지난달 엔비디아의 개발자 행사 ‘GTC 2026’에서 그랬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딸 매디슨 황이 최 회장에게 먼저 다가와 “아들과 운동하는 회장님처럼 부친도 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근황을 전할 정도. 엔비디아의 2인자로 불리는 제프 피셔 수석부사장도 행사장을 돌던 최 회장을 일부러 찾았다. 최 회장은 스스럼없이 어깨동무하며 친밀감을 나타냈다.

해외에선 기업 오너, CEO의 잦은 대외 행보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로 유명한 젠슨 황은 말할 것도 없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젠슨 황 못지않다. 매 분기 콘퍼런스콜에 등장하기 전 5분 정도 트는 일렉트로닉댄스음악(EDM)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다. 기업설명회(IR) 행사에서 애널리스트의 이름을 부르며 친근함을 나타내는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 리사 수 AMD CEO의 모습도 한국 서학 개미에게 이젠 익숙한 광경이다.

한국은 달랐다. 기업사를 보면 주요 총수, CEO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직원과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일까. 외부 활동보다 사업에 몰두해 회사 키우는 걸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은둔의 경영자’란 수식어는 그렇게 탄생했다.

총수 인맥이 기업 자산

세상은 변했다. 요즘 한국 기업 총수·CEO의 역할은 사무실에서 결정하고 책임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알리고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게 경영인의 미덕이 됐다. 최 회장의 활발한 해외 네트워킹도 전략적 판단의 결과물로 평가된다.

성과도 나온다. 젠슨 황,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인공지능(AI) 반도체 삼각 동맹’을 제안한 것도 최 회장이라고 한다. 결과는 아는 대로다. SK하이닉스는 삼각 동맹을 바탕으로 최근 2~3년 HBM 시장을 주도했다.

최근 최 회장은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등 테크 거물들의 응원 문구가 적힌 깁스 사진을 SNS에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8주 전, 나보다 키도 커지고 힘도 세진 아들과 테니스 치다가 손목뼈에 금이 갔다’는 TMI(과한 개인 정보)까지 곁들였다. 그런데도 최 회장에 대해 과거처럼 ‘오버한다’는 반응이 없는 건 왜일까. 깁스 사진을 통해 빅테크와 ‘AI 반도체 동맹’을 강조하고 싶은 최 회장의 뜻을 사람들이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 간 긴밀한 협업·분업이 AI 패권을 결정하는 시대, 총수의 활발한 대외 활동은 더 이상 흠이 아니라 회사의 경쟁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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