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어느 오후, 동네를 산책하다가 오래된 초등학교 앞을 지나게 됐다. 이미 수업이 끝난 시간이었지만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잠시 후 익숙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걸음을 멈추게 됐다. 특별할 것 없는 학교 종소리였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움직였다. 점심시간을 기다리던 교실의 풍경,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던 기억, 방과 후 자주 찾던 교문 앞 문방구까지 한꺼번에 떠올랐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 소리 하나가 오래전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특정한 소리는 우리가 지나온 계절과 공간을 순식간에 현재로 데려온다. 사람은 눈으로 본 풍경보다 귀로 들었던 풍경을 더 오래 간직하며 살아가는가 보다. 문득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떠올랐다.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유난히 종소리 같은 울림이 자주 등장한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장엄한 도입부, 전주곡의 깊고 풍성한 화음들, 그리고 아예 제목 자체가 ‘종(The Bells)’인 대작까지 남겼다. 음악학자들은 종종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본질은 종소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그의 작품 세계에서 종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이유는 그의 어린 시절과 연결돼 있다. 당시 러시아 사람들에게 교회의 종은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예배의 시작을 알리고, 축제를 기념하며, 때로는 위급한 상황을 전하는 공동체의 목소리였다. 결혼식과 장례식, 기쁨과 슬픔의 순간마다 종소리가 함께했다. 사람들의 삶 자체가 종과 함께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라흐마니노프 역시 그런 풍경 속에서 성장했다. 러시아 시골 영지에서 자란 그는 멀리 수도원과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중에 그는 러시아의 종소리가 자신에게 가장 강렬한 기억 가운데 하나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의 종 문화가 서유럽과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서유럽의 종이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데 중점을 둔다면, 러시아의 종은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리며 거대한 음향의 파도를 만들어낸다. 멜로디보다는 울림과 공명, 그리고 공간 전체를 채우는 잔향이 더 중요하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음악 역시 그렇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에게 종소리의 의미는 단순히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소리 이상이었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고향의 기억이기도 했다. 러시아 혁...
라흐마니노프가 음악에 붙잡아둔 고향의 종소리[허명현의 클래식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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