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국물 한입에 바다 한가득… 정직하게 우려낸 묵호 복지리[김도언의 너희가 노포를 아느냐]

1 day ago 1

강원 동해시 묵호동 ‘동남횟집’의 복지리. 1인분에 1만3000원이다. 김도언 소설가 제공

강원 동해시 묵호동 ‘동남횟집’의 복지리. 1인분에 1만3000원이다. 김도언 소설가 제공

김도언 소설가

김도언 소설가
서울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KTX의 속도가 붙을수록 도시의 잿빛 점성이 점점 느슨해지는 걸 느낀다. 창밖 풍경이 건물에서 들판으로, 다시 바다로 바뀌는 동안 마음밭도 그만큼 푸르러진다. 두 시간 남짓, 생각보다 짧은 여정 끝에 닿는 곳이 동해 묵호항이다.

신비하게도 묵호에 도착하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항구 특유의 짠내와 바다를 오래 보고 살아온 이들의 느린 걸음,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여행자들의 설레는 표정까지…. 이곳에선 누구나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것이 흉이 되지 않는다.

게으르고 느리게 산책하던 중 묵호항 근처 골목에서 발견한 집이 ‘동남횟집’이다. 간판도 화려하지 않은데, 문 앞에 내다 건 반건조 생선들이 이 집의 오랜 내공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그렇지만 노포도 특유의 기운을 숨길 수 없는 법이다. 이 집이 그랬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닷가 식당 특유의 소란스러움 대신 차분한 공기가 먼저 느껴진다. 주인도 과하게 말을 걸지 않는다. “편한 데 앉으세요”라고 담백하게 한마디 건넬 뿐이다. 어딘지 강퍅함이 느껴지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다.

자리에 앉아 복지리 2인분을 주문했다. 사실 묵호까지 와서 굳이 복지리를 먹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집에 은은하게 밴 복지리 내음은 이 선택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알려준다. 냄비가 가스버너에 올려지면 먼저 푸짐한 양에 살짝 감동하게 된다. 2인분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복어살과 건더기들이다. 국물은 맑고 투명한데, 그 속에는 바다의 깊이가 그대로 녹아 있다. 숟가락을 한 번 뜨면 조미료의 맛은 일절 없고 신선한 재료 자체의 결이 느껴진다. 복어살은 두부처럼 부드럽고 국물은 칼칼할 정도로 시원하다. 이 맛은 ‘잘 만든 맛’이라기보다 ‘자연스럽게 우린 맛’에 가깝다.

이 집 메뉴에선 가자미회도 빠질 수 없다. 뼈째 썰어낸 얇은 회 한 점을 입에 넣으면 씹히는 감각과 함께 은근한 단맛이 올라온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활생선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식감이다. 가자미회는 채소에 밥과 비벼 먹는 것이 이 집의 룰이다. 이 집의 음식은 화려하지 않은 대신 정직하고 후덕한 인상이다. 밑반찬에서도 정갈한 손맛이 느껴진다.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을 보게 된다. 옆 테이블에서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행객들이 음식 사진을 찍다가 행복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든다. 이상하게도 동남횟집에서는 누구도 과하게 들떠 있지 않다. 음식이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동네의 공기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균형이 참 마뜩하다.

이 집은 관광지에서 흔히 접하는 계산적인 친절이나 이기적인 상업성이 없다. 가격도, 태도도, 음식도 모두 미덥고 수더분하다. 이곳에서는 ‘잘 먹었다’는 느낌보다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남는다. 식당을 나와 묵호항에서 어달해변 쪽으로 걸어갔다. 쪽빛 물결이 햇빛을 받아 부서지고, 바람은 차갑지 않게 얼굴을 스친다. 도시에서 짓눌린 피로들이 이 바다에서 슬슬 풀어진다. 바다와 더불어 문을 여닫는 동남횟집에, 반드시 파도라도 되어 다시 오리라 다짐한다.

김도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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