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짧고 맑은 가을볕 아래
네 희고 둥근 엉덩이로 흙을 조금씩 밀어내고
그 속에 집 짓는 너를 생각하면
나는 사뭇 진지해야 되는데
무야, 무우야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는데무얼 잡고 힘을 쓰는지
네 희고 둥근 엉덩이로 조금씩 흙을 밀어내고
그 안에 들어가 사는 너를 생각하면
나는 왜 이렇게 즐거우냐
―이상국(1946∼ )
연말에 식구가 병이 나 며칠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퇴원 후 입맛이 돌아오지 않고 핼쑥해져 걱정이었는데 곁에서 본 선배가 “우리 엄마 무를 먹여보자!” 했다. 무? 처음엔 흘려들었는데, 선배의 어머니가 ‘칼무’로 담근 김치를 맛보고 식구의 입맛이 돌아오더니 그때부터 차곡차곡 빠진 살을 되찾는 게 아닌가! 과연 지금껏 맛본 모든 무김치 중 최고의 맛이었다. 선배의 어머니는 연이어 섞박지, 순무김치, 깍두기를 담가 보내주셨고 무는 더 이상 평범한 채소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보약이었다. 새해가 되도록 온통 무 생각에 사로잡힌 와중에 이 시를 읽고 반가웠다. 누구든 살면서 한 번쯤은 “무야, 무야” 부르고 싶고, 치켜세우고 싶어지는 날이 있는 걸까? 마지막 연을 보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마땅히 잡을 것도 없는 무가 땅속에서 끙끙 힘을 주며 자라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지금도 무는 “희고 둥근 엉덩이로 조금씩 흙을 밀어내고” 단단히 자라고 있을 것이다. 어릴 때 체하면, 할머니가 껍질을 깎아 얇게 저민 무를 손에 쥐여주었다. 좁은 방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휘청휘청 밖으로 나오는 사람에게 어른들은 얼른 동치미 국물부터 마시게 했다. 찬양하기에 마땅한 무, 누군가를 위해 무김치를 해 먹이는 사람에게 큰 복 있기를! 괜히 허공에 대고 외치고 싶다. “무야, 무우야!”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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