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광엽 칼럼] 론스타 사태 22년, 돌아봐야 할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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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광엽 칼럼] 론스타 사태 22년, 돌아봐야 할 자화상

‘경제관료가 투기펀드의 먹튀를 도우며 국부 유출과 혈세 낭비를 부른 매국적 사건.’ 익숙한 론스타 서사다. 말하자면 ‘먹튀’와 ‘매국’이 론스타 사태를 상징하는 두 단어다.

그런데 사건 디테일과 법적 판단은 통념과 상당히 다르다. 아니 거의 정반대다. 지난주 ISD 소송(중재) 완승만 봐도 그렇다.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는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손해배상할 게 없다고 결정했다. 론스타는 7조원 배상금을 청구해 한때 4000억원을 확보했지만 이번 완패로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단순히 ‘4000억원 대 0원’이라는 숫자 이상의 의미다. ‘엉터리 행정으로 혈세를 낭비했다’는 매국 프레임의 근거가 무너졌다. 한국 정부가 글로벌 규칙을 준수 중이라는 점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인증됐다. 악명 높은 론스타를 상대로 나라 위신을 세우고 정당성을 입증했다. ‘ISD=사법주권포기’라는 일각의 극단적 주장도 설 자리를 잃었다.

‘먹튀 공모’ 프레임도 15년 전 사법부에 의해 부인된 상태다. 주범으로 기소된 변양호 국장은 1~3심 내리 무죄를 받았다. 최종심은 ‘진보법관의 아이콘’으로 불린 대법관(박시환)이 주심을 맡아 정치적 고려로 볼 여지도 없다. 당시 법원은 핵심 쟁점인 ‘외환은행 BIS비율 하향’과 ‘론스타 인수 적격성 부여’를 위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예정된 파국을 막을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을 고려한 정책적 결단으로 인정했다. 외환은행이 카드 사태, 현대그룹 위기, SK 분식회계라는 삼각 파고에 휘청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피엔딩 모양새를 갖췄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악연 22년 동안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너무 많다. 시민단체와 노동운동의 타락상이 뼈아프다. 투기자본감시센터 대표는 론스타에 접근해 8억원을 챙겼다. 전국사무금융연맹 간부 출신 노동운동가였기에 더 쇼킹했다. 참여연대·민변은 ISD 승소에도 여전히 모피아 재수사를 주장 중이다.

과격 투쟁으로 이름을 얻어 권력 중심부로 진입한 이도 적잖다. 대통령실 경제안보비서관인 송기호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1년 전 김어준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승산 없다’며 소송을 포기하자고 주장해 구설에 오른 주인공이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도 투쟁 현장에서 자주 목격됐다. 정치권에도 오기형·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 권영국 정의당 대표 등 론스타 투사가 수두룩하다.

무죄 판정이 나왔지만 공직자들은 무도덕·이권 행보로 큰 실망을 안겼다. 논란의 핵 변양호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1년여 뒤 시중은행권에서 펀딩받아 대규모 사모펀드를 설립했다. 외환은행에서도 돈을 유치해 오해를 키웠다. 소명감 충만한 엘리트 대신 모피아라는 멸칭이 유행하게 된 계기다.

고생 끝에 얻은 것도 있다. 값비싼 수업료가 금융 선진화의 촉매가 됐다. 토종사모펀드 등 제도 개선으로 이어져 금융생태계 구축에 기여했다. 소용돌이 한편에서 유능한 국가기구와 공직자의 존재가 확인됐다. 법무부, 총리실, 기획재정부, 외교부, 산업통상부, 금융위, 국세청이 합심해 혈세를 지켰다. 검사 시절 외환카드 주가 조작을 밝혀내고, 법무장관으로 ISD 승소에 기여한 한동훈의 활약도 인상적이다.

‘론스타 유령’과의 결별로 여유가 생긴 만큼 냉정한 비즈니스 결산이 필요한 때다.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먹튀 프레임’의 정당성 검증도 빼놓을 수 없다. 론스타는 외환은행 주식을 7년 만에 매수가의 2.8배에 매도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가 2.7배(700→1900) 오른 것과 비슷하다. 배당과 콜옵션까지 감안한 수익은 4조6000억원에 달하지만 그래도 무작정 매도할 일은 아니다. 인수 직후 금융가에선 ‘론스타가 제대로 물렸다’는 평가가 만만찮았다. 자회사 외환카드가 부도 위기로 내몰리는 바람에 충당금이 급증해서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외환은행은 금융권 총자산수익률(ROA) 1위에 올랐다.

세금 포탈, 투자자 외면, 당국 무시 같은 안하무인을 감싸자는 게 아니다. 사실에 기초해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국 경제도 어두운 론스타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다. 쟁점 판단이 일단락됐음에도 공론장에선 ‘먹튀·매국’ 프레임이 위력을 발휘 중이다. 경제 문제에서만큼은 ‘김어준식 음모론’과 결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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