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다[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38〉

2 hours ago 2

어제는 비가 왔다. 햇빛에 물이 넘치고 있다. 어제는 비가 왔다. 물빛에 얼굴이 넘치고 있다. 얼굴을 보라. 얼굴이여 보라. 넘쳐서 어디까지 흘러가는지. 기분에 따라 다르다. 감정에 따라 다르고 날씨에 따라서도 다르다는 비가 왔다. 어제는 흘러넘쳤다. 오늘까지 넘치고 있는 비가 왔다. 나는 장례식에 참석할 것 같다. 아직 죽었다는 소식은 도착하지 않았다. 오십 년 넘게 친구였는데 비가 왔다. 물이 넘치고 있다. 그는 충분히 살았다는 표정이다. 표정은 충분했다. 물이 다 빠져나간 표정이다. 넘치고 있는 표정이다. 무엇이? 그런데 무엇이? 비가 왔다. 햇빛에 물이 넘치고 있다. (중략) 장례식에 갔다. 이 하루가 끝날 것 같지 않다.

―김언(1973∼ )

누구에게나 ‘너무한 날’이 있다. 이 시는 ‘너무한’ 이야기를 빗줄기에 기대어 하고 있다. 화자에겐 50년 된 친구가 있다. “물이 다 빠져나간 표정”으로 죽어가는 중이다. 화자는 견디기 힘든 슬픔 앞에서 슬프다는 말 대신 한사코 “비가 왔다”고 말한다. 슬프다는 말 대신 “물빛에 얼굴이 넘치고 있다”고 말한다. 슬프다는 말 대신 “어제는 흘러넘쳤다”고 말한다. 시는 누구도 한 적 없는 방식으로, 다르게 말하기다. 무턱대고 다르게(특이하게) 말한다고 다 시가 되진 않는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이의 얼굴에서 “물이 다 빠져나간 표정”을 읽어내고, 슬픔을 통제하는 동시에 새로 빚어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세상을 관찰하고 진찰한 후 자기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다. 쏟아지는 슬픔으로 얼굴이 물빛으로 넘칠 때, 그 찰나를 종이에 붙잡아 두는 사람이다. 오랜 친구와의 이별을 얼굴로 받아내는 사람을 상상하니, 빗속에서 우는 일처럼 하염없고 슬프다.

박연준 시인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