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키우는 근교 농장, 피서객 몰리는 유원… 뚝섬의 변신은 무죄[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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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기능 떠받친 외곽의 배후지… 수운 기능 줄자 상업 농업지 변모
넓은 유휴지 갖춰 기반시설 집적… 정수장-골프장 단골 후보지 꼽혀
유원지 개발로 30년간 피서 명소… 서울 편입 뒤 공장지대로 재편돼

한국에서 첫 수도 물줄기가 시작된 뚝섬 정수장(1907년 준공)의 현 모습으로, 지금은 서울시 수도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한국에서 첫 수도 물줄기가 시작된 뚝섬 정수장(1907년 준공)의 현 모습으로, 지금은 서울시 수도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섬 아닌 섬, 뚝섬의 변천사

오늘날 서울에는 실제로 섬이 아니면서도 ‘섬’이라는 이름을 지닌 곳이 있다. 바로 ‘뚝섬’이다. 대략 현재의 성동구 성수동과 광진구 구의동·자양동 일대다. 조선시대 뚝섬은 둑섬, 둑도, 살곶이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한자로는 ‘독도(纛島)’라 표기했다. 한양도성의 동쪽 교외에 자리한 이 지역은 한강과 중랑천이 범람하며 만들어낸 비옥하고 넓은 평지였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뚝섬은 일찍부터 관마(官馬)를 기르는 목장과 군사 훈련장 등으로 사용됐고, 이후에는 채소를 재배해 도성에 공급하는 상업적 농업지로 발전했다. 한강과 인접했지만 홍수 때마다 물길이 수시로 바뀌어 별다른 포구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상류에서 떠내려온 뗏목을 숯으로 가공해 한양에 공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살았다. 대체로 뚝섬은 도성의 기능을 뒷받침하는 배후지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일제강점기 뚝섬은 경기 고양군 독도면(纛島面)으로 편제됐으나, 지역의 기본적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10년대에는 여전히 목재와 연료용 임산물을 모아들이는 수운 기반의 집산지로 유명했다. 당시 경성에서 소비되는 장작과 목탄의 상당량이 한강을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고 장작, 땔감을 취급하는 도매상만 40여 곳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은 점차 축소됐다. 새로운 교통 인프라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1915년 경춘가도 개통으로 북한강 수운에 의존하던 강원 내륙의 물류 수송이 화물자동차 이용으로 전환됐고, 1928년에는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인 충주까지 충북선 철도가 연결되면서 물자 이동의 중심축이 육상 운송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 결과 수운의 중간 기착지로서 뚝섬이 맡아온 역할도 자연히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뚝섬의 대도시 근교 농업지로서의 역할은 여전했다. 이미 한일병합 이전부터 통감부는 뚝섬에 원예시험장을 설치해 가지, 감자, 파 등 채소류와 사과, 배, 포도 등 과실류를 시험 재배했다. 동양척식회사도 뚝섬 일대 토지를 매입해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 일본인 개인이 운영하는 민간 과수원도 늘었는데, 특히 사과 재배가 활발했다. 1910년대 들어 뚝섬 사과는 “조선 및 내지(內地·일본)만으로는 판로가 좁을” 정도로 생산량이 증가했다. 1914년 7월 25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사과 생산량이 늘어) 멀리 만주, 하얼빈, 블라디보스톡 방면까지” 유통망을 넓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뚝섬은 경성 도심과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지만, 중랑천이 가로막고 있어 지리적으로는 단절된 느낌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1920년대부터 상경민이 많이 정착한 외곽의 다른 지역에 비해 뚝섬의 인구 증가는 상대적으로 미미했고 산업적 발전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 같은 조건은 1936년 경성 행정구역 확장 과정에서도 뚝섬이 편입 대상에서 제외되는 이유로 작용했다. 당시 총독부 도시계획과장 신바 고헤이(榛葉孝平)는 “뚝섬은 중랑천으로 경계가 되어 연속된 도로 계획을 수립하기 어려우므로 경성에 편입하기 곤란하다”고 설명했다.(1936년 제1회 시가지계획위원회회의록) 결국 시가지계획구역에 포함되지 않은 뚝섬은 일제 말까지도 농경지 중심의 지역적 특성을 유지했다. 1940년경 뚝섬 일대 토지의 3분의 2 이상이 동양척식회사 소유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뚝섬은 넓은 유휴 공간을 갖춘 대도시 외곽 지역이라는 특성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경성의 도시화 과정에서 필요했던 각종 대형 기반시설이 많이 들어섰다. 그중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상수도 정수장이다. 1907년 대한수도회사는 뚝섬 정수장을 완공해 경성에 상수도 공급을 시작했다. 뚝섬 정수장은 약품을 사용하지 않고 원수가 여과지를 천천히 통과하며 불순물을 제거하는 완속(緩速) 여과법을 적용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상수도 정수장이었다. 이 정수장은 광복 이후에도 꾸준히 사용돼 1990년까지 가동됐다.

뚝섬은 시내에 있던 대형 위락시설을 옮길 필요가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후보지로 거론됐다. 그 대표적 사례가 골프장이다. 1921년 조선호텔 투숙객을 위한 용도로 효창원(孝昌園·문효세자와 위빈 성씨의 묘)에 조성된 경성 골프장은 청량리 의릉(懿陵·경종과 선의왕후의 묘) 일대로 옮겼다가 1929년 다시 독도면 군자리의 유릉(裕陵) 부지로 이전했다. 유릉은 순종의 첫 번째 부인 순명효황후의 묘였는데, 1926년 순종 사후 남양주 홍릉으로 이장됐다. 이로 인해 공지가 된 유릉 일대로 골프장이 이전한 것이다. 효창원과 청량리 골프장이 9홀 규모였던 데 비해 군자리 골프장은 부지가 넓어 정규 18홀 코스를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또 경성∼강릉 간 도로를 이용해 도심부에서 자동차로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 최적의 골프장 후보지로 여겨졌다.(일본골프연감 1937년판)

뚝섬에는 경마장도 들어설 계획이었다. 경성의 경마장은 애초에 여의도 육군 용지에 조성됐으나 1928년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로 옮겨 운영됐다. 그러나 1936년 신설리가 경성에 편입되고 개발 계획이 추진되면서 경마장 역시 다시 이전할 필요가 생겼다. 총독부는 1940년 새로운 경마장 후보지로 뚝섬을 선정했지만 곧이어 발발한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경마장을 이전하지 못한 채 8·15 광복을 맞았다. 실제 뚝섬 경마장은 6·25전쟁이 끝난 1954년 현재 서울숲 자리에 조성됐다.

뚝섬에는 대중적인 위락시설도 들어섰다. 1927년 발간된 여행안내서 ‘취미의 조선 여행(趣味の朝鮮の旅)’은 경성 근교의 유람지로 세검정, 청량리, 우이동, 노량진, 북한산과 함께 뚝섬을 소개하며 이 지역을 “농촌의 풍광이 남아 있어 봄에는 전원 구경, 여름에는 뱃놀이와 피서, 가을에는 과수원 구경을 하며 휴식할 수 있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뚝섬이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유원지로 자리 잡은 것은 경성궤도회사가 이 일대를 개발하면서부터다. 정규 전차 노선이 닿지 않던 교외 지역의 교통 사업을 모색하던 경성궤도는 1930년 왕십리∼뚝섬 구간에 궤도를 놓고 기동차(機動車·처음에는 가솔린차였으나 이후 전차화)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왕십리∼동대문 구간을 연장해 노선을 완성했다. 경성궤도는 당시 일본의 사철(私鐵) 회사들이 흔히 그러했듯 영업 이익을 더 내기 위해 운수업과 함께 한강변 자갈 채취 판매업, 오물·신탄 운반업 등 다양한 부대사업을 운영했다.

뚝섬유원지는 경성궤도의 가장 큰 부대사업으로 1934년 문을 열었다. 1936년 나온 조선철도협회 경성궤도 연선 안내(1936년)는 뚝섬 유원지에 대해 “한강 강안의 1만여 평의 광활한 부지에 어린이 수영장, 낚시 연못, 분수탑, 각종 운동기구, 운동장, 산책로, 식당 등의 설비를 갖춘 명랑한 유원지로서 동대문이나 왕십리에서 유원지까지 왕복승차권을 소지하고 있으면 무료 입장 혜택을 준다”고 설명했다.

뚝섬유원지를 전면에 내세운 1938년 경성궤도회사 신문 광고. 당시 유원지의 높은 인기를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뚝섬유원지를 전면에 내세운 1938년 경성궤도회사 신문 광고. 당시 유원지의 높은 인기를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뚝섬유원지의 인기는 대단했다. 경성궤도는 여름철 성수기에 사람들이 몰리자 유원지행 피서 유람차를 운영했다. 1939년 8월 14일 매일신보에 따르면 동대문에서부터 출발하는 뚝섬유원지행의 궤도차는 못 쓰는 차까지 다 출동을 시켜도 승객을 수용할 수가 없어 일대가 수라장을 이루었다. 이날 뚝섬을 찾은 인원은 2만5000명이나 됐다.

1958년 개봉한 영화 ‘지옥화’ 속 뚝섬유원지 산책로 장면. 1930년대부터 약 30년 동안 인기 있는 피서지였던 뚝섬의 1950년대 풍경을 생생히 보여준다. 사진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1958년 개봉한 영화 ‘지옥화’ 속 뚝섬유원지 산책로 장면. 1930년대부터 약 30년 동안 인기 있는 피서지였던 뚝섬의 1950년대 풍경을 생생히 보여준다. 사진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뚝섬은 1949년 서울시 행정구역이 대폭 확장될 때 비로소 서울시에 편입됐다. 그러나 편입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역의 모습과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성수동 일대가 공장지대로 본격 개발되면서 뚝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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