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유럽도 속도 조절하는 ESG 공시, 우리만 앞서갈 일인가

1 month ago 24

정부와 여당이 어제 발표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제도화 방안은 글로벌 규제 흐름과 기업 여건을 외면한 과잉·과속 규제다. 제도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현실을 외면한 규제를 이토록 서두를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애초 금융위원회가 지난 2월 내놓은 초안은 공시 대상을 자산 30조원 이상으로 시작해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일정 기간 거래소 공시로 운용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당정 협의를 거치면서 대상이 ‘2028년부터 10조원 이상’으로 대폭 확대됐다. 공시 대상 기업은 2028년 107곳에서 2030년 259곳으로 크게 늘어난다. 방식도 완충지대인 거래소 공시를 건너뛰고 ‘법정 공시’로 직행하기로 했다. 당정은 연내 자본시장법을 개정해 후속 조치를 속전속결로 끝내겠다는 방침이다.

ESG 공시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기후 리스크와 탄소 배출 정보는 글로벌 기관투자가의 판단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싱가포르 호주 일본 등 주요국도 공시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다. 자본시장 신뢰도를 높여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이겠다는 정부 설명에도 일리는 있다.

문제는 속도와 방식이다. 공시의 신뢰성을 담보할 기초 인프라가 부실하다.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 협력업체 데이터 검증, 기후 리스크의 재무영향평가 등 준비가 부족하다. 정부는 3년간 한시적 면책을 하겠다고 했지만, 기업은 부실공시에 따른 소송과 제재 위험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법무법인과 회계법인에 지급해야 할 자문 비용만 불어날 것이다. 인증 여력이 없는 중소업체가 공급망에서 밀려날 위험도 크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추세는 ‘속도 조절’이다. ESG 규범을 주도해온 유럽연합(EU)조차 공급망 보고 범위를 축소하고, 민감 정보의 생략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기업 부담을 줄이고 있다. 일본도 공시 대상을 시가총액 3조엔 이상 대기업부터 적용하는 등 단계적으로 접근한다.

정부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업종별 온실가스 데이터베이스 구축, 표준 산정 기준, 제3자 인증체계 등 관련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노동협약·탄소감축에서처럼 국제 기준을 앞질러 목표를 달성하려는 당정의 고질적인 ‘규제 모범생 콤플렉스’가 ESG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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