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을 오르는 힘[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3 weeks ago 2

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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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하원 차량을 기다리다가 현오를 마주쳤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때부터 봐왔던 이웃사촌이다. 흰 띠를 동여매고 달려와 놀이터가 떠나가라 우렁찬 품새를 보여주던 꼬마는 어느덧 훌쩍 자라 열한 살이 되었다. 키가 커지고 목소리가 낮아진 현오는 사춘기에 들어선 건지 입을 다물고선 예전처럼 웃지 않는다. 이제는 마주쳐도 꾸벅 인사만 하고 지나가거나, 수그린 채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과묵한 남자아이가 되었다. 어린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외향도 성격도 달라져 속을 알 수 없는 그 애가 낯설기만 하다.

현오와 나란히 서서 태권도 학원차를 기다렸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은 보라띠, 바짓단이 짤따란 도복 차림의 현오는 벌써 품띠를 매고 있었다. 멀뚱히 서 있자니 어색해서 “너 품띠야?”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2품이에요.” 다행히 현오가 대답해 줬다.

무뚝뚝한 남자아이랑 어떻게 대화해야 하더라. 잘은 모르지만 내가 아는 태권도 정보를 총동원해 대화를 이어갔다. “품띠부턴 국기원에서 승급 심사를 본다며? 엄청나게 어렵다더라. 너는 어때?” 현오는 의외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국기원 심사부터가 진짜죠. 이제 3품 따려고 연습 중이에요. 저는요. 태권도에 소질이 없거든요? 그래도 자신은 있어요.” 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무엇일까. 의기양양한 표정에서 어릴 적 얼굴이 묻어나기에, 나는 웃음을 꾹 참고서 대단하다며 장난스럽게 칭찬했다. 그러자 돌아온 현오의 대답이 묵직했다. “저는 진짜 열심히 하거든요.”

그러더니 현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줬다. “히말라야에서는 양을 어떻게 사고파는지 알아요? 승급 심사 때 사범님이 해주신 이야기인데요. 히말라야 사람들은 양의 가격을 매길 때, 산 중턱에 양을 풀어 두고서 지켜본대요. 산비탈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작은 양이라도 값을 비싸게 매기고, 산 아래로 내려가면 아무리 큰 양이라도 값을 내린대요. 양의 가치를 매길 때는요. 양의 크기가 아니라, 양의 의지를 보는 거예요. 산비탈을 오르는 양들은 당장은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신선하고 좋은 풀을 먹으면서 튼튼해진대요. 하지만 산 아래로 내려가는 양들은 당장은 쉽게 풀을 먹겠지만, 나중에는 먹을 걸로 경쟁하다가 굶어 죽게 된대요. 근데요. 산비탈로 올라가는 양은 얼마 없어요. 왜냐하면 다들 편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니까. 산비탈을 오르는 힘은 정말로 어렵고 힘들잖아요. 제가요. 4년쯤 노력해 보니 알겠더라고요. 태권도에 소질은 없어도 진짜로 열심히 하잖아요? 그러면 실력이 쌓이게 돼요.”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품띠를 가리키며 현오가 여기에 무슨 뜻이 있는 줄 아냐고 물었다. 고개를 내젓는 나에게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듯 속닥거렸다. “백절불굴(百折不屈). 백 번 꺾여도 백 번 다시 하기. 이게 바로 태권도의 정신이에요.”

골목길로 학원차가 들어섰다. 입을 꾹 다문 열한 살 현오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너는 산비탈을 오르는 중이었구나. “너, 진짜 멋지다!” 냉큼 감탄했을 때, 그 애가 돌아보며 씩 웃었다. “저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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