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들] 독일에서 중동으로…간호사 수출대국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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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고생시켜서"…파독 간호사 앞 눈물 연설

간호사 노동환경 최악, '장롱면허' 전체 절반

'정당한 대우' 미국 탈출 러시 속 중동도 각광

병원·대학·간협 이해 복잡…정치권 책임져야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1964년 12월 10일,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함보른 광산을 찾았다. 갱도에서 막 올라온 광부들과 야간 근무를 마친 간호사들의 퀭한 눈빛과 마주쳤다. 연설문을 읽던 박정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이역만리에서 이렇게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한시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옆의 육영수 여사도 눈물을 훔쳤고, 이내 식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머나먼 낯선 땅에서 흘린 그들의 눈물은 국민을 수출 역군으로 떠밀어야 했던 극빈국 한국의 슬픈 자화상으로 남았다.

이미지 확대 나이팅게일 정신을 이어받겠습니다

나이팅게일 정신을 이어받겠습니다

(수원=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15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에서 열린 '간호대학 제25회 나이팅게일 선서식'에서 학생들이 촛불 의식을 하고 있다. 2023.11.15

60년이 지난 지금, 선진국으로 바뀐 한국의 간호사들이 눈물을 삼키며 해외로 떠나고 있다. 가난이 아니라 살인적 노동 환경 때문이다.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매년 신규 의사 수의 7배 이상인 2만4천명의 간호사가 배출되지만, 이직률이 40%를 넘고, 장롱면허로 불리는 비활동 간호사는 전체 간호사 수(55만명)의 절반에 이른다.

환자 20~30명을 챙겨야 하는 혹독한 3교대 근무, '미용의'로 몰리는 의사들 몫까지 떠맡아야 하는 왜곡된 업무 환경에 감정노동까지 합쳐져 신규 인력이 버틸 수 없는 구조다.

여기에 대형 병원은 간호사를 채용해놓고 필요할 때만 불러 쓰는 '웨이팅게일(Waitingale)'을 양산하며 청년 실업난을 더하고 있다.

다른 선진국은 정반대다. 미국은 많은 주가 자격 요건을 갖춘 간호사에게 일부 의사 역할을 부여해 고임금을 주고, 호주는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를 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최근엔 중동 국가가 각광받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한국보다 최대 3배 많은 급여와 숙식, 항공권에 장기 휴가까지 제공하며 간호사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이러니 젊은 간호사들이 외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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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최전선의 간호사들

(대구=연합뉴스) 11일 대구의료원 음압병실에서 특수간호팀 한 간호사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2023.5.11

한국의 간호사 문제는 구조적이고 복합적이다. 교육부와 복지부의 방관 속에 사립대 재단들이 간호학과를 무분별하게 신설하는 게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취업률이 높아 정부의 대학 평가에 유리하고, 정원만 늘리면 재단 곳간이 늘어나니 '싸구려 대학'들까지 앞다퉈 간호과 간판을 내거는 것이다.

이로 인해 20년 전 1만2천명이던 신규 간호사 수가 지난해 2만4천으로 2배나 증가했다. 간호사 수가 이렇게 무한대로 늘어나니 병원은 숙련 간호사 인력을 지키기보다 값싼 신규 인력으로 갈아 끼우면 그만이라는 식의 '배째라 경영'을 지속하고 있다.

대학은 등록금 수입을 위해 학과를 늘리고, 정치권은 지역 표를 의식해 이를 수수방관하고, 직역 단체는 교수 인력 수급 유지와 의료계 영향력 확대를 염두에 두고 정원 감축에 선뜻 나서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후진국 시절 간호사들은 가난 때문에 울며 떠났지만, 선진국에서 태어난 지금의 간호사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적 모순에 진절머리가 나 나라를 등지고 있다.

이미지 확대 파독 간호사 앞에서 눈시울 붉힌 박정희와 육영수

파독 간호사 앞에서 눈시울 붉힌 박정희와 육영수

[정부 자료사진]

모든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 적정 환자 수 법제화, 간호 인력 확충에 대한 재정 보상, 간호사 전문성 확대, 무분별한 학과 신설 제한, 정원 감축은 그들의 의무다.

함보른 갱도 앞에서 눈물짓던 간호사들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일궜다. 그러나 오늘, 해외로 탈출하는 간호사들에게는 귀환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라 수준이 달라졌다면 눈물의 이유도 달라져야 한다. 웨이팅게일들에게 그저 '가만 있으라'고 요구하는 나라는 선진국을 말할 자격이 없다.

jah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11월23일 09시0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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