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명지소금의 합작품 ‘안동 간고등어’[김창일의 갯마을 탐구]〈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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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지게꾼과 우마차꾼은 간고등어를 싣고 산길을 걸었다. 영덕에서는 황장재와 가릿재를 넘었고, 영해에서 출발한 이들은 창수재를, 울진에서 출발한 이들은 주구령을 넘어 안동의 챗거리 장터에 모였다. ‘챗거리’는 고등어를 실은 달구지의 채찍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값비싼 소금을 뿌린 뒤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온 간고등어는 양반이 아니면 제사상과 밥상에 올리기 어려운 귀한 해산물이었다. 얼마 전 소셜미디어에서 간고등어를 두고 논쟁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논쟁의 방향은 소금으로 귀결됐다. 전통적인 제염 방식은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하므로 많은 땔감과 노동력이 든다. 따라서 비싼 소금으로 고등어를 염장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먼저 나왔다. 일제강점기 때 천일염 방식이 도입돼 소금 생산량이 증가한 이후 간고등어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었다. 반면 전통 방식의 염전이 동해안 곳곳에 있었기에 조선시대에도 간고등어가 유통됐을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됐다. 결론이 궁금해 지켜봤으나 추측만 설왕설래한 채 마무리됐다. 안동 간고등어에 사용된 소금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영덕 인근 바다에서 잡은 고등어는 현지에서 1차 염장을 했다. 이때 사용한 소금은 영덕의 염전에서 만든 소금이다. 조선 초 권근이 저술한 ‘양촌집’ 권11에 영덕에서 소금이 생산됐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경상도지리지’(1425년)에는 영해도호부와 영덕현에 총 238척의 염분이 있다고 했다.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에는 영덕의 자염 생산지로 16곳을 지목하고 있다. 영덕은 자염 생산이 풍부한 지역이었으므로 고등어 염장이 어렵지 않았을 테다. 1차 염장을 한 간고등어가 안동 챗거리 장터에 도착하면 한 번 더 소금을 쳐 저장성을 높인 뒤 판매했다. 간고등어를 집으로 가져가 소금을 추가로 치거나 소금단지에 묻어 보관했다. 손님이 오면 보관해 뒀던 간고등어를 꺼내 대접했다. 이때 사용한 소금은 낙동강 하구 명지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이다. 정약용은 ‘경세유표’(1817년)에서 “나라 안에서 소금의 이익은 영남이 제일이다. 명지도에서 매년 많은 양의 소금을 구우니 낙동포(상주 지역)에 염창을 설치했다”고 적었다. 또한 상주의 여러 고을은 산길이 험해 동해의 소금을 운반하기 어려워 남쪽에 있는 명지도에서 생산된 소금을 먹는다고 했다. 기녀 강담운이 쓴 ‘금릉잡시’에 명지소금에 관한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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