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얼굴 자리를 대신한 붓질… 공허한 세계에 의미 불어넣는 예술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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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작품으로 본 현대의 성물 헨니 알프탄의 2014년 유화 ‘아브라카다브라’. 얼굴 없는 이의 두 손이 회갈색 붓질이 남은 흰 천을 들고 있다. 사진 출처 뉴욕 핀란드문화원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다. 누군가 검은색 배경에 흰색 천을 두 손으로 들고 있다. 그 흰 천의 중앙에는 회갈색의 얼룩 같은 붓 터치가 있으니, 그림 안에 또 그림이 있는 셈이다. 핀란드의 화가 헨니 알프탄이 2014년에 그린 유화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다. 대체 이 그림의 취지는 뭘까. 집요하게 극사실적으로 대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기상천외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복합적인 구성이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 평범해 보이는 그림은 2000년에 걸친 서양문명사를 집약한다.서양미술사에 익숙한 사람은 ‘아브라카다브라’를 보는 순간, ‘베로니카의 베일(Veronica‘s Veil)’을 떠올리게 된다. 유럽의 대형 미술관에 가면 예수의 얼굴이 찍힌 천 그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한 그림의 제목은 대개 ‘베로니카의 베일’이거나 ‘베라 아이콘(Vera Icon·참다운 아이콘)’이다. ‘베라’는 ‘참’을 뜻하기도 하고, ‘베로니카’를 뜻하기도 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는데, 마침 길가에 있던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피와 땀이 흐르는 예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그 천에 예수의 얼굴이 그대로 찍히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베로니카의 베일’은 성물(聖物)로 취급돼 대성당에 보관됐고, 환자의 병을 고치는 등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비슷한 성물로는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천으로 알려진 ‘토리노의 수의’가 있다. ‘토리노의 수의’에도 예수의 몸 형상이 그대로 찍혀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한스 멤링이 1470년경 그린 ‘성녀 베로니카’. 성녀가 예수의 얼굴이 찍힌 천을 펼쳐 보인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베로니카의 베일’이나 ‘토리노의 수의’의 진위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그 같은 성물의 기원과 위력을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기적을 기대하며 성물을 찾아왔기에 그 순례길에는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고, 상업이 발달했기에 도시가 유지됐다. 어떤 사물이 위력을 가진다는 생각은 성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심리적인 현상으로 간주되는 것들도 그 당시에는 사물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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