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종전 협상과 부패 스캔들[횡설수설/장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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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을 상실하느냐, 아니면 동맹(미국)을 잃느냐 기로에 섰다.”(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이번 안이 최종 평화적 해결의 기초가 될 수 있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제시한 종전안에 대한 양국 정상의 반응은 이렇게 달랐다. 이번 안이 얼마나 러시아에 유리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내에선 ‘사실상 항복 문서’라는 불만이 들끓고 있다.

▷28개 항으로 돼 있는 종전안의 핵심은 루한스크와 도네츠크를 합친 돈바스 지역을 “사실상 러시아 영토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전쟁 초반부터 돈바스는 최대 격전지였다. 우크라이나 국토의 8%를 차지하는 돈바스는 석탄, 철강 등 원자재가 풍부한 산업의 중심지이자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전략적 요충지다. 러시아는 주민의 약 40%가 러시아계라는 점을 앞세워 돈바스를 점령하는 데 주력했고, 우크라이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런 지역을 고스란히 넘겨주라는 건 우크라이나인들에겐 참기 어려운 굴욕이다.

▷종전안에는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헌법에 명시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나토의 동진(東進)에 결사반대하는 러시아에 맞서 젤렌스키 정부가 나토 가입을 추진한 게 전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였는데, 미국이 러시아 손을 들어준 것이다. 종전안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하면 군사적 대응과 국제적 제재를 복원한다’ 등의 내용이 있긴 하지만 손에 잡히는 안전 보장 방안은 없다. 뉴욕타임스의 지적대로 “전쟁 중단 외에는 우크라이나에 별 이득이 없는” 협상이다.

▷트럼프가 이렇게 일방적인 종전안을 들이밀 수 있었던 건 전시에 벌어진 역대급 부패 스캔들로 인해 젤렌스키 정부가 흔들리고 있어서다. 국영 원자력기업에서 발생한 1억 달러(약 1470억 원) 규모의 횡령 사건을 주도한 젤렌스키의 한 측근은 집에 황금 변기를 둘 정도였다고 한다. 전직 부총리도 이 과정에서 약 20억 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4년째 이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전방 지역 주민 3분의 1은 먹을 것도 부족한 판에 고위층은 뒷돈 잔치를 벌였으니 국민이 분노하고 국론은 갈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약점을 트럼프가 파고든 것이다.

▷이번 종전안의 초안은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푸틴의 최측근이 만들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전했다. 미국도 자국의 이득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해외에서 동결된 러시아 자산 1000억 달러를 우크라이나 재건에 투입하되 그 수익의 절반은 미국이 가져가기로 했다. 반면 민간인만 약 5만 명이 죽거나 다친 피해국 우크라이나는 종전 협상에서는 소외되는 형국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집안 단속조차 제대로 못 한 약소국이 설 자리는 좁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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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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