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에 관한 논쟁이 도입한 이원론을 포기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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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은 물리적 세계와 분리된 예외가 아니라, 뇌우나 단백질 접힘처럼 매우 복잡한 자연 현상으로 이해 가능함
- Chalmers의 어려운 문제는 뇌 과정과 경험 사이의 설명 간극을 전제하지만, 그 간극은 이원론을 먼저 들여올 때 생김
- 1인칭 경험과 3인칭 과학 설명의 차이는 같은 뇌 현상이 자신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외부에 나타나는 관점 차이임
- 철학적 좀비 논증은 비물리적 의식의 존재를 처음부터 받아들여야 인간과 좀비를 구별할 수 있어 설득력이 약함
- 더 중요한 과제는 초월적 영혼을 가정하지 않고 뇌와 몸의 작동을 이해하며, 정신생활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임
의식 논쟁의 출발점
- 의식은 물리적 세계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영혼”도 신체와 세계의 다른 현상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음
- 인간은 자기 이미지가 흔들리는 지식에 저항해 왔고, Darwin의 공통 조상 개념이 격렬한 저항을 받은 것처럼 의식 논쟁도 인간이 비활성 물질과 같은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함
- 중세 서구 문명은 인간을 몸과 영혼이라는 두 실체로 나눴고, 영혼은 기억·감정·주관성·자유·책임·덕·가치의 저장소이자 신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초월적 존재로 여겨졌음
-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지만, 의식이 어려운 이유는 자연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뇌우나 단백질 접힘처럼 매우 복잡한 자연 현상이기 때문임
- 어떤 현상의 이해가 갱신된다고 해서 그 현상이 부정되지는 않음
- 고대와 중세에는 일몰을 태양이 지구 위를 움직이며 내려가는 현상으로 이해했지만, 오늘날에는 지구 자전으로 태양이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으로 이해함
- 이 변화가 일몰을 환상으로 만들지 않듯, 뇌의 작동을 더 잘 이해한다고 해서 영혼이 환상이나 비현실이 되지는 않음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대한 반박
- 의식 논쟁은 David Chalmers가 1994년 Tucson에서 한 영향력 있는 강연의 용어로 자주 구성됨
- Chalmers는 의식의 두 문제를 구분했음
- 뇌 과정이 관찰 가능한 행동과 보고 가능한 내적 행동을 어떻게 낳는지 이해하는 문제를 의식의 “쉬운 문제”라고 불렀음
- 왜 뇌의 행동에 경험이 동반되는가라는 문제를 “어려운 문제”라고 불렀음
- Chalmers는 인간의 전체 행동과 내면생활에 대한 모든 보고를 설명하더라도, 뇌 과정과 경험 사이에는 여전히 설명 간극이 남는다고 봄
- 이 간극은 경험의 가상적 기본 단위인 “qualia”, 어떤 실체가 경험을 가질 수 있다는 “주관성”, Thomas Nagel의 표현처럼 어떤 경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라는 문제로 반복됨
- 현재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나중에 이해하게 되었을 때 무엇을 이해하게 될지 지금 알 수 있다는 전제는 성립하기 어려움
- “어려운 문제”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배경에는 Baruch Spinoza가 수세기 전 예견한 생각, 즉 영혼도 자연의 다른 현상과 같은 기본 성질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강한 저항이 있음
- 르네상스 시대에는 하늘과 지구가 같은 성질이라는 점을, Darwin 이후에는 동물과 인간이 친족이라는 점을, 최근 생물학 발전 이후에는 생명체와 비활성 물질이 같은 성질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음
- 의식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은 정신과 자연, 주체와 객체가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세계관을 유지하게 만듦
세계 바깥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보기
- Chalmers는 경험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보지만, 과학적 이해는 경험 바깥에 있지 않고 경험 자체를 다룸
- 경험론은 과학의 대안이 아니라 과학의 전통적 개념 토대에 속함
- Alexander Bogdanov의 표현처럼, 과학은 경험을 성공적으로 집단 조직해 온 역사적 과정임
- 과학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계를 바깥에서 관찰하고 기술하는 직접 설명으로 보면 처음부터 이원론이 들어오며, 지식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환원 불가능한 간극이 생김
- 지식과 이해의 주체인 인간은 세계 바깥에 있지 않고 세계의 일부임
- 이론과 지식은 바깥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탈신체적 관점이 아니라, 실제 세계를 항해하도록 돕는 신체화된 도구임
- 이해, 감정, 지각, 경험은 모두 자연 현상임
- 의식에 대한 혼란은 지식·의식·qualia를 과학적 그림에서 따로 도출해야 하는 대상으로 취급할 때 생김
- 실제로 과학적 그림은 바로 지식·의식·qualia에 관한 이야기이며, 경험은 뇌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추가로 얹힌 것이 아님
- 1인칭 경험 기술과 3인칭 과학적 설명 사이의 이원론은 같은 뇌 현상이 그 뇌 자신에게 경험되는 방식과 다른 대상에게 경험되는 방식의 관점 차이로 이해될 수 있음
- “주관적 경험”, “qualia”, “의식”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에 붙인 이름임
- 몸과 뇌 안에서 일어나는 방식은 외부에서 상호작용하는 대상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다름
- 이것은 신비한 설명 간극 때문이 아님
- “빨강”이라는 qualia는 빨간색을 보거나 기억하거나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겪는 과정의 이름임
- “고양이”라고 부르는 동물이 왜 고양이처럼 보이는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듯, “빨강”이 왜 빨갛게 보이는지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음
- 1인칭 관점은 객관적 3인칭 관점에서 도출해야 하는 것이 아님
- 모든 설명은 관점적이며, 지식은 언제나 신체화되어 있음
- 세계는 실재하지만, 그 세계에 대한 어떤 설명도 세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음
- 주관성은 신비한 것이 아니라 관점의 특수한 사례임
- “형이상학적 간극”과 “설명 간극”은 과학적 그림을 궁극적 현실의 직접 설명으로 오해할 때 생김
‘철학적 좀비’ 논증의 약점
- Chalmers의 “철학적 좀비”는 인간과 모든 면에서 똑같이 보이고 행동하며, 감정·느낌·꿈·경험을 보고하지만 의식은 없는 가상적 존재임
- Chalmers의 표현대로라면 그 안에는 “아무도 집에 없음”
- 이 사고실험은 행동과, 오직 내성으로만 접근 가능한 가상적 현실을 구분하도록 유도하는 수사적 장치임
- Chalmers는 철학적 좀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적 경험이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봄
- 그러나 철학적 좀비는 주관적 경험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해야 함
- 그렇지 않다면 인간과 경험적으로 구별될 수 있음
- Chalmers의 핵심은 그가 말하는 가상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의식의 존재를 오직 내성으로만 확신할 수 있다는 데 있음
- 내성 중에는 뇌의 물리적 과정이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고 확신시킴
- 같은 일이 이론상 좀비의 뇌에서도 일어나며, 그 좀비 역시 자신에게 의식이 있다고 확신하게 됨
- 좀비가 실제로 그런 비물리적 경험이 없는데도 같은 확신을 갖게 된다면, 자신이 신비한 비물리적 경험을 갖는다는 결론을 믿을 근거가 약해짐
- 물리적으로 동일한 좀비 쌍둥이는 경험까지 포함해 정확히 같아야 함
- 철학적 좀비는 Chalmers가 증명하려는 것, 즉 세계에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를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보통 인간과 구별됨
- 철학적 좀비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하며, 설득력 낮은 형이상학적 가능성과 초월적 영혼 개념에 대한 향수를 드러냄
영혼은 실재하지만 자연의 일부임
- “의식”과 “경험”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며 우리를 이루는 사건을 가리키는 이름임
- 그런 사건이 충분한 능력을 가진 외부 관찰자에게 다른 이름으로 동등하게 기술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반박하는 논증은 없음
- 현재 완전한 외부 설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런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증거가 아님
- 잘못된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마음과 몸 사이에 형이상학적 간극이 존재한다고 처음부터 가정함
- 이 가정은 지난 수세기 동안 자연에 대해 배운 모든 것과 충돌함
- 마음은 높은 수준의 언어로 적절히 기술된 뇌의 행동임
-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경험과 외부에서 보는 나에 대한 경험 중 어느 하나가 우선하지 않음
- 접근 가능한 세계는 그 세계에 대해 가진 정보이며, 자신도 그 세계의 일부임
- 현실에 대한 궁극적이거나 근본적인 설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요구할 필요는 없음
- 모든 설명은 근사적이고 사각지대를 가지며, 현실 안에서 실현되고, 같은 현실의 일부에 신체화됨
- 표상과 그것이 구현된 장소 사이에는 연결부가 있고, 이는 표상 안의 특이점이 될 수 있지만 형이상학적 간극이나 설명 간극은 아님
더 중요한 과제
-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존재하지 않음
- 정신생활은 우주의 다른 현상과 같은 성질일 수 있음
- 더 흥미로운 과제는 “어려운 문제”를 사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자연의 나머지와 초월적이거나 종류가 다르다고 가정하지 않고 뇌와 몸의 작동을 더 잘 이해하는 것임
-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내적 자아가 있음
- 인간은 Kant적 의미의 초월적 주체로 자신을 다룰 수 있음
- 인간은 감정과 영적 생활을 가지며 qualia를 경험함
- 이런 것들은 물리적 상태에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물리적 설명에서 “덜어냄”으로써 얻어지는 것임
- 정신 과정은 그 중요한 특징만 포착하는 방식으로 기술된 물리적 과정임
- 처음부터 이원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면, 식탁이 원자의 집합이기도 하면서 식탁이라고 말할 수 있듯 영혼과 감정에 대해서도 안전하게 말할 수 있음
- 의식 논쟁이 도입한 해로운 이원론을 버리고, 영혼 또는 영적 생활이 근본 물리학과 양립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함
과학의 성공이 가리키는 결론
- 이 관점이 이원론보다 더 그럴듯한 이유는 과학이나 물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때문이 아님
- 과학은 수백 년 동안 놀랍고 예기치 못한 성공을 거두며, 겉보기의 형이상학적 간극이 실제로는 그런 간극이 아니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 왔음
- 지구는 하늘과 형이상학적으로 다르지 않음
- 생명체는 비활성 물질과 형이상학적으로 다르지 않음
- 인간은 다른 동물과 형이상학적으로 다르지 않음
- 영혼은 몸과 형이상학적으로 다르지 않음
- 인간은 이 세계의 다른 모든 것처럼 자연의 일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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