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를 잡는 자가 인공지능(AI)을 지배한다.”
삼성전자 1분기 실적을 분석한 해외 투자보고서 문장에서 낯익은 단어 하나가 눈에 꽂혔다. 초크 포인트(choke point·급소). 호르무즈해협 봉쇄와 함께 전 세계에 각인된 용어다. 이란이 세계 원유시장 흐름의 병목을 장악하면서 글로벌 경제의 급소를 쥐고 있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삼성전자의 어닝서프라이즈를 “경이로운 수준”이라고 전하며 “고대역폭메모리(HBM)가 AI 인프라의 새로운 급소가 됐다”고 분석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삼성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2024년 5월 최고경영자(CEO)로 복귀한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한 주 내내 반도체 현안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그가 쏟아낸 말은 충격적이었다. “삼성은 비대한 초식공룡이다” “엔비디아에서 ‘삼성은 위기감은 없고 프로세스만 따진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라”와 같은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당시 ‘삼성전자는 온 국민의 우환거리’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 삼성이 컨틴전시 플랜을 짜고 환골탈태하면서 돌아오기까지 2년이 필요했다.
전문가들도 이제 삼성전자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과 같은 ‘빅테크 리그’에 진입했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의 올해 영업이익 추정치는 290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유가증권시장 전체의 23%를 차지한다.
이 같은 수치는 반도체 슈퍼사이클 시기에 주기적으로 나온 ‘삼성 공화국’을 연상시킨다. 2014년 당시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삼성의 경제 집중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특정 기업집단에 대한 경제력 집중은 대외 충격에 취약하게 한다”며 보조를 맞췄다.
12년이 지난 지금, ‘삼성 착시’의 경고는 들리지 않는다. 반도체 쏠림이 경제 안전판이 된 역설적 상황이다. 한국이 대외 충격을 받을 때 정부가 우선 관리하는 지표는 수출과 외화보유액, 경상수지 등 세 가지다. 한국의 3월 수출액은 월간 기준 처음으로 800억달러를 넘어선 861억달러를 기록했다. 이 중 38%를 반도체가 맡았다. 원달러 환율 1500원선이 뉴노멀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은행 안팎에선 “환율의 절대 수준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 섞인 발언이 이어졌다. 올해 경상수지 흑자는 처음으로 2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위험 요소도 있다. 반도체라는 안전판을 지탱하는 기반이 위태롭다. 호르무즈해협과 HBM이라는 두 개의 초크 포인트를 연결하는 지점, 곧 에너지와 공급망이다. 액화천연가스(LNG)와 헬륨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등 반도체 공장에 공급하는 전력 상당 부분은 한국전력의 LNG 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반도체 웨이퍼 냉각과 식각 공정에 필수 재료인 헬륨은 대체재가 없다. 한국은 헬륨의 65%를 카타르에서 수입한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미국산 헬륨으로 대체해 반도체 공장이 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해명해야 할 만큼 보이지 않는 급소다.
이 같은 공급망 충격은 ‘세계 반도체의 심장’으로 불리는 대만이 먼저 받고 있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1위 TSMC의 본산인 대만은 에너지 위기를 국가 생존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에너지의 98%를 수입에 의존하는 대만의 LNG 비축량은 11일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을 중동의 카타르 등에 의존한다. 대만 정부는 TSMC의 가동 중단을 ‘국가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있다. 일반 가정과 비핵심 산업단지에 순환 단전을 시행하더라도 TSMC가 있는 신주, 타이난 과학단지에는 전력을 끊지 않는 전용라인을 운용하고 있다. 대만이 TSMC를 지키기 위해 에너지의 모든 ‘판돈’을 걸었다는 분석은 과장이 아니다.
K반도체의 반면교사가 되는 대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한국은 반도체를 지킬 의지와 준비가 돼 있느냐다. 대만은 TSMC를 둘러싼 공급망 생태계를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반도체 방패)’라고 부른다. 반도체산업이 국가 안보를 지키는 방어 기제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반도체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글로벌 AI 공급망의 목줄이자 전략적 급소다. ‘삼성 쏠림’도 우려의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자산’이다. 한국은 독점적 HBM 지위와 공급망의 종속이라는 두 개의 초크 포인트 사이에 서 있다. 선택은 자명하다. 반도체 우위는 단단히 쥐되, 에너지와 공급망이라는 급소는 ‘안보’라는 방패로 감싸야 한다. 초크 포인트는 잡히면 지배당하지만, 쥐면 세상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된다. 한국은 지금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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