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원을 들여 가게를 열어 1년에 500만원을 벌었다고 하자. 장부상으로는 흑자다. 그런데 1억원을 은행에 넣었어도 6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이 장사는 안 하는 게 나았다. 기업도 다르지 않다. 자본비용을 넘기지 못한 영업이익은 숫자일 뿐이다. 회계상 이익과 실제 이익은 다르다. 기업이 생산과 판매 활동을 통해 번 돈에서 자본비용을 뺀 나머지를 경제적 이익(EP·economic profit)이라고 부른다. EP가 플러스여야 실제 돈값을 한 것이다.
이 기준을 국내 주요 대기업에 적용해 분석하면 뜻밖의 결과가 나온다.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10위권의 한 대기업은 지난 1분기에 영업이익을 냈지만, 자본비용을 뺀 EP는 적자로 전환했다. 영업이익이 1년 전보다 60% 넘게 증가했는데도 그렇다. 조(兆) 단위 이익을 낸 기업 중에서도 EP가 마이너스인 곳이 있다. 덩치만 큰, 재무제표상으로 흑자인 기업이다.
일본 정부는 최근 발표한 ‘성장투자 가이던스’에서 EP를 기업 가치와 자본 배분을 판단하는 잣대로 제시했다. 닛케이지수는 최근 사상 처음 70,000을 돌파하며 주요국 증시 상승률 중 3위권 성적을 내고 있다. 키옥시아 등 반도체와 인공지능(AI) 관련 대형주가 상승을 주도하지만, 바탕에는 지난 10년간 이어진 시장 개혁이 깔려 있다. 일본 정부는 자기자본이익률(ROE) 8%와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를 기준으로 기업에 주주가치를 끌어올리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일본은 ‘밸류업의 모범생’으로 불리며 저평가에서 벗어났다.
문제는 기업이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맞추기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대폭 늘렸다는 데 있다. 미래에 투자하지 않는 기업은 성장할 수 없다. 일본의 고민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주주환원을 넘어 자본 효율이 높은 사업에 투자해 부가가치를 키워야 지속적인 주가 상승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히타치제작소가 모범 사례로 꼽힌다. 2009년 대규모 적자를 낸 히타치는 비주력 사업을 팔고 정보기술(IT)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는 데 자본을 투입했다. 그 결과 ROE는 12%대로, PBR은 3배 중반까지 높아졌고, 히타치는 일본 시가총액 10위 기업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일본 정부가 내놓은 성장투자 가이던스는 밸류업 프로그램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여기서 EP는 자금 배정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기업은 먼저 실제 번 돈이 자본비용을 넘겼는지를 본다. 많았다면 성장을 위한 투자처가 있는지 따져본 뒤 우선 투입한다. 자본비용을 넘어설 투자처를 찾지 못했다면 현금을 쌓기보다 주주에게 돌려준다. 가짜 영업이익, 즉 자본비용에도 못 미치는 흑자를 낸 기업은 주주환원보다 사업의 부가가치를 올리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 기업의 고민은 더 복잡하다. 일본의 과제가 주주환원과 성장투자의 균형 찾기라면 한국에는 ‘영업이익의 n% 성과급 배분’이라는 변수가 붙었다.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명문화한 SK하이닉스가 대표 사례다. 올해 예상 영업이익 250조원을 감안하면 10%, 25조원을 먼저 빼놔야 한다. 투자 재원은 미국 증시 상장(ADR)을 통해 확보할 계획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재평가받으려는 포석도 있다. 그러자 신주 발행은 기존 주주가치를 희석시킨다는 논란을 불렀다. 이 결과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 등 100조원 규모의 주주환원을 병행하는 절충안이 거론된다.
다른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PBR 1배 미만 탈출, 노조의 성과급 배분, 미래를 위한 투자 등 세 가지 요구가 동시에 충돌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순서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 질문에 입을 닫고 있다. 주주가치 제고를 압박할 뿐 자본비용과 성장투자를 함께 보는 가이드라인에 관한 고민은 전무하다. 초과 세수로 미래성장기금과 국부펀드 중 무엇을 만드는 게 나을지 부처 간 밥그릇 싸움이 벌어질 뿐이다.
기업이 흑자를 냈다고 주주, 근로자 모두에게 나눠줄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먼저 돈값을 벌었는지, 성장을 위한 투자처가 있는지, 그래도 남는 경제적 잉여가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배분에 관한 기준 없이는 주주환원도, 투자도, 성과급도 매번 힘겨루기로 결정될 뿐이다. 지금은 초과 세수라는 ‘황금알’에 눈독을 들일 때가 아니다. 정부의 우선순위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도록 자원 배분의 기준을 마련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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