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의 넥스트 거버넌스] 〈21〉기승전결(起承轉結)이 안 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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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세계는 전쟁 중이다. 보이는 전쟁은 중동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전쟁은 국가의 미래를 놓고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글로벌 강국들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하며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에너지 기술의 주도권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우리 역시 소버린 AI 구현과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을 선언하며 이 거대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거대한 포부 뒤에는 기이한 엇박자가 존재한다. AI 전략을 설계해야 할 핵심 인력들은 정치 일정에 따라 자리를 비우고, 첨단 기술을 구동할 공장에는 정작 전기가 닿지 않는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 검색은 기존 검색보다 수십 배의 전력을 소비한다. 초거대 데이터센터 하나가 사용하는 전력은 중소도시의 소비량과 맞먹는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조성이 마무리되는 2042년에는 수도권 전체 전력 소비량의 4분의 1에 달하는 추가 전력이 필요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진짜 문제는 전기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발전소는 지방에 많은데 전기를 써야 하는 공장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이를 연결해야 할 전력망은 규제와 갈등에 막혀 제때 구축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발전소들은 생산한 전기를 보내지 못해 발전량을 줄이는 송전 제약을 겪고 있다. 발전도 하고 있고 기술도 개발하고 있는데, 정작 그것들을 연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많은 영역에서 시작의 에너지는 강하지만 완성의 지속성은 약하다. 불과 10여년 전 우리는 AI 시대의 전력 수요를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채 탈원전을 추진했다. 이제 와서 AI와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발전소를 늘리려 하니 이번에는 전력망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AI를 국가 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선언하며 국가적 대전환의 서막은 거창하게 열어 놓았지만 이를 완성할 인프라와 인재, 지속성은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AI만의 문제가 아니다. 필자가 정부에 몸담았을 때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정책의 부족이 아니라 정책의 과잉이었다. 부처는 새로운 정책으로 평가받고, 국회와 언론은 새로운 대책을 요구한다. 어느 순간부터 정책의 숫자가 정부 성과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우선순위를 바꾸고 국정과제를 교체한다. 정책이 축적되지 못하는 사이 기업과 국민은 미래를 보고 투자하기보다 정책 변화에 대응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산업정책도, 주거정책도, 교육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국가를 발전시키는 것은 정책의 숫자가 아니다. 정책은 발표보다 정착이, 시작보다 축적이 중요하다.

며칠 전 스페인에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핵심 구조물 준공식이 열렸다.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를 시작한 지 1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정부와 정치 지도자가 바뀌었지만 프로젝트는 중단되지 않았다. 이 건축물이 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위대한 국가 과제는 결코 한 사람의 임기나 정치 일정 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역시 정권마다 새로운 정책을 쏟아내는 나라를 넘어야 한다. 국가 경쟁력은 무엇을 시작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겼는가에서 결정된다. 위대한 국가는 한 세대가 시작한 과제를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 역사로 축적하는 나라다. 이를 위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과제만큼은 정권의 사업이 아니라 국가의 프로젝트로 관리되어야 한다.

기(起)를 만드는 나라는 많다. 그러나 결(結)을 완성하는 나라만이 선진국이 된다. 정치가 미래를 재단하는 나라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국가 프로젝트가 미래를 만들어 가는 나라. 그것이 넥스트 거버넌스가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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