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인플레이션 파이터’는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임명한 폴 볼커였다. 당시 미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란혁명 이후 2차 오일쇼크와 달러 약세가 겹치며 물가가 13% 넘게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 늪에 빠졌다. 볼커 의장은 취임 후 연 10%이던 기준금리를 1년 만에 연 20%까지 끌어올리는 초강수를 뒀다. 두 자릿수이던 물가상승률은 1983년 3.2%로 급락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경기 침체와 대량 실업이 뒤따랐고, 고금리에 짓눌린 농민들은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DC로 몰려들었다. 잇단 살해 위협에 볼커 의장은 항상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다녔다.
과도한 통화 긴축은 선거에 악재지만 정권은 개입하지 않았다. 카터 대통령은 물론 후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역시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존중했다. 장기 불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고통스러운 선택은 1990년대 미국의 장기 호황 ‘롱 붐(The long boom)’의 초석이 됐다.
한동안 잊힌 인플레 파이터의 시간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지난 6주간의 중동전쟁은 세계 경제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에너지 수송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해협이 막히자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엔 깊은 균열이 갔다. 그 여파로 인한 고유가·고환율은 전방위로 물가 압력을 키우고 있다. 미국과 이란이 지난 8일 2주 휴전에 합의하며 대파국은 일단 피했지만, 협상의 향방은 안갯속이다. 종전 기대는 한순간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2주라는 시간이 단순한 ‘시간 벌기’에 그친다면 이 전쟁은 더 큰 소용돌이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설령 종전 합의에 이르고 호르무즈해협이 다시 열리더라도 유가는 전쟁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뉴노멀 시대가 열릴 것이란 경고가 잇따른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중동전쟁이 끝나더라도 유가가 배럴당 90달러 아래로 쉽게 내려가지 않고, 내년 4분기까지도 전쟁 이전 수준으로의 복귀는 어려울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이번 전쟁은 단순한 공급 차질을 넘어 에너지 공급망의 동맥 자체를 끊었다. 이란의 보복 공격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글로벌 에너지 심장부에 있는 대형 에너지 생산 시설 15곳이 파괴됐다. 이 핵심 시설을 완전히 복구하는 데만 최소 3~5년이 걸릴 전망이다.
모든 경제 지표가 인플레이션의 타이머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고유가·고환율은 한두 달 시차를 두고 물가에 본격 반영된다. 이달 이후가 더 걱정되는 이유다. 팬데믹 시기 풀린 자금은 여전히 자산시장 곳곳에 독소처럼 남아 있다. 과잉 유동성은 언제든 타오를 수 있는 인플레이션의 불씨다. 당장 26조원 규모 ‘전쟁 추경’도 물가 상승을 자극하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인플레이션을 잠재우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심리적 뇌관인 기대인플레이션을 꺾는 것이다.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부터 해소하는 게 먼저다. 그러나 이는 통화정책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려도 재정이 적자를 내면 정책 효과는 반감된다. 강력한 재정준칙을 통해 나랏빚을 엄격히 관리하는 재정의 절제도 기대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주요 수단이다.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서는 거친 파도를 넘을 수 없다.
인플레이션 대응은 중앙은행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니다. 정부와 한은이 보조를 맞춰 총력 대응에 나서야 한다. 국가 전체가 인플레 파이터의 각오로 위기에 맞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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