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가볍다." 배우 유해진의 이 한마디처럼, 장항준 감독의 겉모습은 몸무게만큼이나 가벼워 보이고 말투는 늘 유쾌하다. 자신의 성취를 앞세우기보다 농담을 섞어 분위기를 풀고, 주변을 먼저 돌아보는 태도 역시 변함없다. 스타 작가로 자리 잡은 아내 김은희의 성공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과시하지 않는 자존감은 그를 설명한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연스럽게 '이 시대의 남편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눈물 자국 없는 말티즈'라는 별명처럼 늘 웃음 뒤에 서 있던 장항준 감독이 이번엔 마침내 자신에게 온 기회를 움켜쥐었다. 2002년 '라이터를 켜라'로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그는 이후 '기억의 밤'(2017), '리바운드'(2023)를 거치며 장르를 넘나드는 연출력을 쌓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첫 사극 '왕과 사는 남자'로 또 한 번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23일 만난 장항준 감독은 요즘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언급하며 솔직한 심정을 먼저 털어놨다. 그는 "요즘에 다 힘든데 저만 살아남은 것 같다. 하하"라며 웃은 뒤, "전체적으로 한국 영화계가 힘들고, 준비하는 감독님들이 투자 받기도 쉽지 않다. 책임감도 느끼고 있고, 이제까지 계속 영화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이 유독 긴장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작품 자체 결이 다르고, 규모적으로 큰 작품이라 긴장되는 건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극이라는 장르가 오히려 도전의 계기가 됐다고 했다. 장 감독은 "사극은 처음에 사극이라는 이유만으로 꺼려졌다.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고증 논란이나 역사 논란 때문에 많은 감독들이 겁내는 분야"라며 "제작비도 많이 들어서 더 꺼려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안 할 때 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다. 하다 보면 유행이 되는데, 그러면 또 안 한다. 똑같은 거 하기 싫다"며 "많이들 안 하길래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첫 사극 연출에 대한 호평에 대해서는 "뿌듯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장 감독은 앞서 "처음엔 망설였으나 김은희 작가의 명을 받고 연출을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그는 "가끔 작품을 마지막으로 결정하기 직전에 서로 물어본다. 하는 게 51, 안 하는 게 49처럼 애매할 때"라며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었고, 김은희 작가가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52대 48이 됐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김 작가의 시사회 참석 여부에 대해서도 그는 "안 오면 되게 이상하지 않나"라며 "나이가 들수록 이렇게 좋은 친구가 또 있을까 싶다. 진짜 내 편이다. 때로는 부모님보다 내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영화를 보면서 좋은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은희 작가와의 작업 관계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장 감독은 "둘 다 자기 일 하느라 바빠서 서로 모니터를 안 해준 지 5년이 넘은 것 같다"며 "예전에는 틈틈이 봐줬는데, 한번은 내 거 봐주면 오빠 거 봐줄게 하고 거래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글 쓰는 사람은 자기 것밖에 눈에 안 들어온다. 머릿속이 꽉 차 있어서 타인의 글은 잘 안 보인다"며 "의견만 물어보는 정도"라고 말했다. 김은희 작가와 나누는 일상 대화는 주로 "'언제 들어올 거야', '뭐 먹었어' 정도"라고 덧붙였다.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 제6대 왕 단종 이홍위의 유배 시절을 스크린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단종은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권좌를 빼앗긴 뒤 유배돼 1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군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기존 사극들이 계유정난 전후의 정치적 격변과 권력 다툼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왕좌에서 밀려난 이후의 시간, 한 인간으로 살아간 단종의 마지막 여정에 시선을 둔다. 이야기는 1457년, 궁을 떠나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향하는 어린 선왕의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사극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인 역사 고증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 장 감독은 의상 실장 심현섭과의 협업을 언급하며 "우리나라 사극의 최고 대가"라고 표현했다. 그는 "욕을 먹지 말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욕을 먹는 순간, 다른 모든 공로들이 허물어진다"고 말했다. 특히 갓 고증에 대해 "조선 초기와 중기의 갓은 다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비치는 갓은 중기 이후 것"이라며 "조선 초기에는 없었던 갓이라 연출적으로 손해가 많다"고 설명했다.
카메라 각도상 눈이 가려지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론은 지키자였다. 착실히 지켜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복식은 밝혀진 자료는 물론,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상상력과 생활사 연구, 자문 교수들과의 논의를 통해 채워갔다고 밝혔다.
영화는 계유정난 이후 영월 유배 상황에 남아 있는 사료를 바탕으로 한다. 장 감독은 "모든 역사극에는 드라마틱하게 만든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2시간 러닝타임 때문에 이야기를 많이 줄였다"고 말했다. 엄흥도 설정에 대해서는 "지방사에 엄흥도의 아들 셋과 함께 숨어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라며 "그 의미를 엄흥도 한 인물에게 몰아주기 위해 아들 한 명을 둔 홀아버지 설정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단종의 최후에 대해서도 다양한 기록을 검토했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왕마다 기록이 다르고, 야사도 다양하다"며 "'연여실기술'이라는 야사를 엔딩의 근거로 삼았다"고 밝혔다. 엄흥도에 대해서는 "'노산이 죽고, 고을의 아전 엄흥도가 곡하며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했다'는 두세 줄 기록에서 출발해, 장사진을 잡은 엄흥도가 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엄흥도 역의 유해진은 단종에 대한 충심보다는 부모의 마음으로 연기했다고 했다. 장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그 정도까지 생각하지 못했다"며 "촬영을 하면서 상전과 하인의 관계가 부자 관계로 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도 유해진과 박지훈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끌렸고, 서로 의지하는 관계였다고 했다.
유해진과의 인연은 2002년 '라이터를 켜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 감독은 "그때는 서로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다시 작품으로 만난 유해진에 대해 그는 "태도가 훌륭하다. 그냥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대본을 태블릿으로 보며 철저히 준비하고, 감정신 전날에는 아무도 말을 못 걸 정도로 몰입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마지막 감정신을 찍을 당시에는 "밤새 그 생각을 하고 온 얼굴이었다"고 전했다.
유해진의 인간적인 면모도 소개했다. 산불로 집을 잃은 스태프 가족을 위해 함께 도움을 보탰던 일, 17살 때부터 몸 담았던 청주의 극단 배우들과 이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일 등을 언급하며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단종 역에 박지훈을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장 감독은 "'약한영웅'을 보고 눈빛이 좋다고 느꼈다"며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눈빛, 분노가 가라앉아 있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느낌이 인물에 힘을 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단종을 나약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 장 감독은 "기록을 보면 단종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고,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며 "활쏘기도 잘했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났다. 정치적으로 희생됐을 뿐"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는 단종을 강한 인물로 설정했고, 영월에서 백성을 만나며 성군의 자질을 배워가는 인물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박지훈의 체중 감량 과정은 쉽지 않았다. 장 감독은 "처음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영화 속보다 두 배 정도 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러다 내 유작이 되겠구나 싶었다"고 농담을 던지면서도, 박지훈이 결국 의지로 살을 빼낸 과정을 높이 평가했다. "운동도 안 했다. 근육이 생기면 안 된다고 하더라. 볼 때마다 쭉쭉 빠졌다. 의지가 상당한 친구"라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큰 배우가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에서 악역에 대한 시선도 분명하다. 장 감독은 "계유정난은 성공한 역모"라며 "성공한 것만 정사가 되고,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져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되기 쉽다"며 "그런 의미에서 단종을 재조명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장항준 감독은 이번 작품 역시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영화가 힘든 시기고, 유해진과 '다른 사람 몫까지 해서 일으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개인의 영달도 좋지만 다들 어려워서 영화계에 붐을 일으키고 싶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딸에게도 이야기 했는데 아빠 직업은 언제든 '유작'일지 모르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데뷔작이 유작이 되기도 한다. 데뷔 하고 30년간 못 찍고 죽으면 유작 아니냐. 언제가 은퇴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배우 캐스팅, 스태프 인선,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기존에 같이 했던 분들도 계시지만 아닌 분들이 거의 다다. 경험하지 못한 또다른 프로페셔널을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또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을 캐스팅 했으니 기본은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존재자체가 체급이 엄청나서 배울 수 있는 배우들이라 도움이 많이 됐다. 촬영장에서까지 시나리오를 고쳤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준익 감독의 칭찬을 떠올렸다. 영화가 끝난 뒤 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항준아, 돈과 인기 다 가졌는데 이것만 없었잖아."
그는 "거장의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고 모두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저는 영화의 요소에서 첫째는 시나리오 둘째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감독이 정신차려 좋은 글을 써야 유해진, 박지훈 같은배우들이 시나리오를 보고 승낙하고, 투자도 받는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연출가에게 라이팅 능력과 배우의 연기를 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장 감독은 그러면서 "어떤 배우가 영화에서 너무 잘했는데 하루 아침에 못하면 전날 쥐약을 먹은 거 아니고서는 연출 탓"이라며 "전체적인 밸런스를 유지하고 훌륭한 연기력을 돋보이게 하는 데 제가 아주 기여를 한 것 같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향해 장난스럽게 "쪽쪽" 키스를 보내며 웃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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