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은 돈 들고 방치는 위험하고… ‘가성비’ 따진 선택, 지역맹주[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1 day ago 1

〈116〉 저비용 질서로서의 지역맹주

당나라 제상 겸 화가 염립본(閻立本·?∼673)의 ‘왕회도’. 당시 지역맹주였던 당 황제가 각국 사신들로부터 조공받는 장면을 10폭 병풍에 담았다. 두루마기 차림의 신라, 고구려, 백제 사신의 모습도 담겨 있다. 사진 출처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당나라 제상 겸 화가 염립본(閻立本·?∼673)의 ‘왕회도’. 당시 지역맹주였던 당 황제가 각국 사신들로부터 조공받는 장면을 10폭 병풍에 담았다. 두루마기 차림의 신라, 고구려, 백제 사신의 모습도 담겨 있다. 사진 출처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미국이 베네수엘라와 이란을 폭격했다. 그뿐이랴. 널리 보도되지 않아도 세계 곳곳에서 국지전이 진행 중이다. 만국이 평등하게 평화를 이루는 상태는 머나먼 꿈과 같다. 현실에서는 힘의 우위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도울 때도 있지만 대체로 위에서 군림한다. 올해 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나 자신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도덕성뿐”이라며 국제법을 무시하는 듯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만국이 그렇게 평화를 유지하기 어렵다면, 아예 하나의 제국이 전 세계를 통치하면 어떤가. 그렇게 되면 적어도 무법천지가 되는 상황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적지 않은 사상가들이 세계정부를 꿈꾸고 이론화하려 들었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통치 비용 때문에라도 세계제국 같은 것은 꿈에 가깝다. 그 대단했다던 몽골제국조차도 실제로 전 세계를 장악하지 못했다. 결국 모든 나라들이 평등한 관계 속에서 세력 균형을 이루거나, 압도적인 하나의 제국이 전 세계를 장악하는 일은 비현실적이다. 결국 남는 것은 세계제국인 척하는 지역맹주들의 경합이다. 실제로 지역맹주 체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널리 존재했던 세계 질서 중 하나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의 리더라기보다는 지역맹주처럼 보이는 것도 미국이 그 어느 때보다 통치 비용에 민감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통치 비용 절감은 모든 맹주의 꿈이다. 전 세계를 장악하기에는 통치 비용이 부담스럽고, 자기 나라에만 갇혀 있기에는 영향력 축소를 감수해야 한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저비용으로 가능한 한 넓은 지역에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까. 일단 국내 질서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철저한 법 집행으로 빈틈없는 치안을 확보한다. 그래야 해외에 써야 할 통치 비용이 국내에서 낭비되지 않을 수 있다. 애써 국내 질서를 확보했다면, 대외 관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원거리 지역에 대한 직접 통제는 포기하는 게 좋다. 비용이 워낙 많이 드니까. 그렇다고 마냥 방치해 둘 수는 없다. 방치된 이들은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역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들여 경제적 이익을 함께 나누거나, 공동방위 체제의 파트너로 삼아 공동 운명체로 만든다. 무역망이나 공동방위 체제는 상대를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효과가 있다. 원거리에 있는 상대도 얻고 싶은 무역 이익이 있고, 방어해야 할 국경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디 오늘날만의 일이랴. 과거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의 세력권 안에 있었고, 느슨하게나마 공동방위 체제의 일부였다. 패권국의 군대 출동 요청에 시달리기도 했고, 패권국 역시 (임진왜란의 경우에서 보듯) 한반도의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엄연히 무역망이 있었다. 자기 세력권 내 국가들에 우선적으로 조공무역의 혜택을 줬다. 오늘날처럼 원재료부터 생산·가공·유통·판매까지 조밀하게 이어지는 공급망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분업적 무역망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러한 무역망 역시 세력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역맹주 체제라고 해서 상황이 늘 맹주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맹주와의 관계를 단절하려 드는 매우 ‘자주적인’ 정권이 출현하거나, 기존 세력권을 이탈해 다른 세력권으로 넘어가려는 경우가 생긴다. 예컨대 한국은 중국의 세력권에 속할 것인가, 미국의 세력권에 속할 것인가, 아니면 양자를 오가는 전략적 위치를 확보할 것인가. 이런 경우에 지역맹주는 큰 비용을 지불해 가며 그 나라를 직접 침공하기도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미국의 베네수엘라 폭격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세력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는 데 이르는 상황은 그 자체로 실패이기도 하다. 군사력의 동원은 엄청난 비용 지출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맹주는 결국 ‘손이 많이 가야 하는 상대’보다는 알아서 복속하는 상대를 원한다. 주변 약소국이 알아서 복속하는 상태야말로 맹주의 꿈이다.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며, 상대가 알아서 인사 올 만큼 맹주의 덕성이 드높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주변국들이 맹주에게 알아서 인사 오는 상태를 그린 그림이 많다. 그 그림이야말로 맹주의 정치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 지역맹주 체제가 인류 역사상 흔했던 만큼, 한국이 속해 왔던 지역 세력권에도 이와 같은 모습을 나타내는 이미지들이 다수 존재한다. 주변국 사신들이 조공을 오는 모습을 그린 직공도(職貢圖),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 왕회도(王會圖)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러한 장르화들이다.

이 그림들은 물론 실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것은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만국래조도’는 만국의 사신들이 조공물을 직접 들고 인사를 올리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물건들이 곧바로 창고로 운반됐으므로 그와 같은 상황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평화롭게 온갖 나라들이 청나라로 찾아온 모습을 그린 건륭 연간의 만국래조도의 이면에는 준가르와의 전쟁이라는 현실이 있었다.

따라서 이 그림에서는 현장의 정보보다는 재현에 담긴 욕망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욕망이란 다름 아닌, 자기 나라 안에 안주하기에는 힘이 넘쳐나고 세계를 정복하기에는 힘이 부족한 지역맹주가 저비용으로 자기 세력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동시에 그 맹주에게 인사함으로써 주변 약소국들은 자신들의 국내 정권을 좀 더 공고히 하고자 했다. 직공도, 만국래조도, 왕회도 같은 그림에 서려 있는 이러한 정치적 욕망은 전근대 시기나 오늘날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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