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엡스타인, 산 트럼프 잡나[횡설수설/이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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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1년도 안 돼 대형 장애물을 만났다. 트럼프 정부가 공개 반대를 고수해 온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수사 기록에 대해 상하원이 사실상 만장일치로 공개하라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엡스타인은 미성년자들을 동원해 정·관·재계 인사들에게 성접대를 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2019년 구치소에서 자살했는데, 그의 ‘고객’으로 의심되는 명단엔 전현직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거물들이 망라돼 있다. 트럼프가 19일 법안에 서명하면서 한 달 내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됐다.

▷엡스타인 사건을 스캔들로 키운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과 경쟁한 대선을 앞두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해 “엡스타인 때문에 큰일을 겪게 될 것”이라며 성접대를 받았음을 암시했다. 이즈음부터 부정선거론과 함께 극우 보수세력의 2대 음모론인 딥스테이트(deep state), 즉 좌파 엘리트 소아성애자들로 구성된 비밀 조직이 세계를 조종한다는 음모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대선에선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해 배후 세력인 딥스테이트를 척결하겠다고 공약했다.

▷대선 승리 후엔 피해자 정보 보호를 명분으로 비공개로 선회했는데, 이후로는 트럼프에게 불리한 정황이 담긴 자료가 유출되며 거꾸로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2000년대 중반 무렵 ‘역겨운 변태’와 절연했다고 했지만 엡스타인은 2011년 지인에게 보낸 메일에서 “트럼프와 피해자가 내 집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고 했고, 죽기 직전 메일에선 “트럼프는 소녀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트럼프가 성범죄에 연루됐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는 상태다.

▷트럼프 정책의 ‘거수기’ 역할을 하던 공화당은 이번 표결에선 하원의원 1명을 빼곤 모두 공개 찬성 쪽에 섰다. 그만큼 엡스타인 음모론은 마가 진영을 결집시키는 핵심 이슈다. 마가를 지탱하는 6개의 기둥이 있는데 미국 우선주의가 중심이고, 나머지가 국경 문제, 반(反)세계화, 표현의 자유, 나라 밖 전쟁 개입 금지, 그리고 ‘우리 국민(we the people)’이다. 마가 진영이 워싱턴 아웃사이더 트럼프를 선택한 건 엡스타인 파일에 나오는 딥스테이트에 맞서 ‘우리 국민’을 보호할 적임자로 봤기 때문이다.

▷클린턴, 오바마 행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은 얼마 전 엡스타인과 연애사를 공유하는 사이임이 드러나 모든 공적 활동을 중단했다. 엡스타인으로부터 미성년자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 앤드루 왕자도 왕실 작위와 칭호를 포기했다. 미국 국민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또 어떤 이름이 나올지 못지않게 왜 트럼프가 감추고자 했는지 궁금해한다. 죽은 엡스타인이 산 트럼프를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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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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