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복[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44〉

31 minutes ago 1

나는 가끔 부끄러워 구석진 바위에 머리를 박고 싶을 때가 있다 대개는 애매함에서 오는 것이다 흐리고 느린 마음은 두꺼비집 같아서 스스로 무너진다 (중략) 그리하여 나는 비 오는 날에도 꽃에 물을 주고 싶고 풀을 뽑고 싶고 매일 내 잡초를 뽑기 위해 일기를 쓴다 그러다가 이 풀도 어여쁘다 이것이 꽃일지도 모르지 나를 향해 귀 기울이는 빛과 함께 가만히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나는 내 정원에 오랜 장마에도 무너지지 않을 부끄러운 바위를 세우고 풀 비스무레한 것을 심기로 한다

―지연(1971∼ )


어렵고 불편한 일인데 그 일 앞에서 자신을 기꺼이 지불하며 “다 제 지복입니다” 하고 말하는 이를 본 적이 있다.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일 앞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사람. 그건 어떤 경지일까? 화자는 시작부터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부끄러움은 “애매함”에서 온다며 “흐리고 느린 마음”을 이끌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 일이란 “비 오는 날에도 꽃에 물을 주고 싶고 풀을 뽑고 싶고 매일 내 잡초를 뽑기 위해 일기를” 쓰는 일이다. 행여 꽃일지도 모른다며 “풀 비스무레한 것을 심기로” 결심하는 일이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지복이라 명명한다. 지복(至福), 더할 수 없는 행복이란 뜻이다.

이 시는 어쩐지 윤동주의 서시와 겹쳐 보인다. 먼 옛날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며 참회했다면, 지금 이곳에서 지연 시인은 “부끄러운 바위”를 세우고 혼자만의 정원에서 풀을 심는다. 꽃은 아니지만 어쩌면 꽃이 될지도 모를, 한 포기 풀을 심는 일! 끝내 더럽혀지지 않을 참회의 언덕에서 울리는 시인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박연준 시인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