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삶은 다른 곳에 있다
첫 번째 액자에는 A를 만나러 길을 떠나는 K가 서 있다. 나머지 액자들은 K의 여정이 어떠했는지를 차곡차곡 보여준다. 길을 떠난 K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걷고 있는 A를 발견한다. 이토록 무난하게 A를 발견하다니, K의 여정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인공에게는 문제가 닥치는 법. K가 큰 소리로 불렀는데도 A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 버린다. K가 서두르는 만큼 A도 서두르기에 두 사람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좋지. 이러다가 A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3단계에서는 A가 K에게 다가오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것 역시 이상하지 않다. 인생에는 불운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대상이 거꾸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행운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의 연애는 성공해왔다. 진짜 아이러니는 4단계에서 온다. 다가온 A가 K를 그냥 지나쳐 가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K가 예상치 못했던 사태다. K는 자신이 A를 만나고 싶어하는 만큼 A도 자신을 만나고자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신을 찾지만, 신도 인간을 찾으리란 법은 없다. 신은 가혹할 정도로 인간에게 냉담할 수 있다.
A가 K를 그냥 지나쳐 가버린 이후, K의 인생에는 지향점이 없다. 그냥 걸을 뿐이다. 하루하루 소일하는 게 삶의 전부인 양, 태어나서 죽는 게 인생의 전부라는 듯, 그저 걷는다. 자신이 애초에 다짐했던 인생의 목적 같은 것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왜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벼락처럼 마지막 단계가 온다. 눈앞에 거대한 빌보드 간판이 나타나서 말한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마지막에 등장한 거대한 빌보드 간판은 K에게 삶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알려주지 않는다. 삶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해 줄 뿐, 삶이 어디 있는지 적시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라고. 태어났으니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인생이 다른 곳에 있다니, 어쩌라고. 거대한 빌보드 간판은 어떤 안내도 해주지 않지만, 아주 무용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삶은 이곳에 있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려주니까. 삶이 어디 있는지 알려면,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이곳에서 계속 헤매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곳”이란? K의 관점에서 볼 때 “이곳”은 15개의 액자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곳은 바로 누군가 초심을 가지고 욕망하고, 그 욕망을 따르고, 그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배반당하고, 정처 없이 걷다가 결국 삶은 이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끝나는 세계다. 15개의 액자가 보여주는 바, 욕망의 발생에서 소진에 이르는 과정 내부에는 삶이 없다. 아니, 욕망을 좇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그 과정 안에 인생이 없다니, 인생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인생은 15개의 액자로 이루어진 세계의 외부에 있다. 그 세계의 내부에 머무는 한 사람은 당장의 자극에 반응하고, 욕망을 일으키고, 그 욕망을 충족하러 동분서주하느라 경황이 없다. 그 과정은 너무 정신없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음미할 수 없다. 그러니 삶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삶은 그 정신없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떨어져 그 과정을 바라보는 순간에 있다. 그렇게 바라보고 음미할 때 비로소 삶은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것이 된다. 책이나 예술은 그렇게 삶을 바라보고 음미할 수 있게 해주는 창문이다. 그러니 삶은 욕망이 들끓는 “여기”에 있지 않고, 예술이나 책을 향유하는 “저기”에 있겠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는 말했다. 진정한 삶은 삶의 외부에 있다고.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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