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주의 광풍이 거세게 불던 나치 독일에선 ‘5000년 독일사’라는 문구가 유행했다. 2000여 년 전 로마와의 접촉에서 시작하는 통설을 제쳐놓고 자국사의 출발점을 별다른 근거도 없이 훌쩍 끌어올렸다. 나치 실력자 하인리히 힘러는 ‘위대한 아리아 인종’의 근원을 찾겠다며 티베트로 대규모 탐사대를 보냈다. 기원이 오래될수록, 영토가 넓을수록 민족사가 더 빛날 것이란 생각 탓에 근대 역사학의 탄생지 독일은 역사 왜곡의 난장판으로 전락했다.
‘영광스러운 과거’는 종종 비루한 현실을 잊게 한다. 콤플렉스 가득한 사회일수록 판타지 같은 옛이야기에 더 집착하는 이유다. 일제의 지배와 6·25 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세대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979년 단군교 계통 태백교라는 종교 창시자로 알려진 이유립이 <환단고기>라는 책을 썼다. 그는 한국사의 시작점을 기원전 7199년까지 끌어올렸다. 한국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뛰어넘는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자리매김했다. 또 한반도와 만주, 중국부터 중동까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종족으로 한민족을 그렸다.
지난 40여 년간 <환단고기>는 대중은 물론 문화계, 정계 등에 스며들며 여러 부작용을 빚었다. 역사학자 중 ‘영광스러운 민족사’라는 대중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 이는 ‘식민사학자’로 매도됐다. 통설인 낙랑군 평양설에 기반해 책을 냈다는 이유로 미국 하버드대가 진행하던 ‘고대 한국사 프로젝트’는 자금 지원이 끊겼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연설문에 ‘역사는 혼과 같다’는 <환단고기> 구절이 등장했고, ‘동북아 역사지도 사업’은 여야 의원들이 ‘식민사관’이라고 트집 잡은 끝에 무산됐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2일 정부 부처 업무보고를 받던 중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환단고기>를 거론하며 이 책에 우호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이후 논란이 일자 대통령실은 서둘러 “<환단고기> 주장에 동의하거나 이에 대한 연구나 검토를 지시한 것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뜬금없이 <환단고기> 소동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역사에 대한 지적 유산이 여전히 척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동욱 한경매거진&북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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