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자신을 ‘규범의 제국’이라 불러왔다. 18세기 산업혁명을 촉발하며 근대 산업 표준을 만들어낸 것도, 계몽주의 사상을 통해 보편적 인권 개념을 확립한 것도 유럽이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수십 개 국가가 유럽연합(EU)이라는 단일 공동체를 이루려면 모두가 동의하는 표준과 준칙이 필요했다. 그렇게 유럽은 규범을 통한 통합의 길을 걸었다.
‘우리가 법을 만들면 세계가 따른다.’ 오랫동안 유럽은 이 확신에 차 있었다. 그 확신이 낳은 것이 ‘세계 최초’,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각종 규제법이다. 2018년 시행된 GDPR(개인정보보호법)이 대표적이다. 개인 데이터 보호를 전 인류의 권리문제로 끌어올렸다. EU가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한 ‘EU AI Act’(EU AI법)에서 정점을 찍었다.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규제법이다. 인간 중심의 안전을 혁신보다 위에 놓은 AI 윤리 원칙을 담았다. AI 위험의 가능성을 규범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유럽에선 디지털 세계가 야생의 정글이 아니라 이성이 설계한 정교한 정원이어야 했다.
최근 그 설계도를 다시 그렸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AI 핵심 규제의 전면 적용 시기를 내년 8월에서 2027년 12월로 연기한다고 밝혔다. AI 기업이 유럽인의 데이터를 학습에 활용할 수 있도록 개인정보 보호 규제도 완화하기로 했다. 기업 로비의 승리? 관료주의의 후퇴? 아니다. 조건 없이 따라야 하는 도덕 규칙과 생존의 자연법칙이 충돌한 결과다. 유럽은 인간 존엄, 데이터 주권, 알고리즘 차별 금지라는 보편적 가치를 AI 규제의 전제로 삼았다. 이번에도 자신을 세계의 도덕적 입법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이 유럽의 디지털 영토를 거칠게 유린하는 와중이었다. 유럽 IT 기업은 도태돼 고사 직전이다. 경쟁력 없이는 규범도 지킬 주체가 사라진다.
유럽은 높은 규제 장벽을 세우면 기업이 그 기준에 맞춰 진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현실은 달랐다. 혁신적인 유럽 기업들은 규제 없는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 유럽은 이미 인터넷 시장을 구글, 메타에 내줬다. AI산업에서도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유럽 내에서 커졌다. 그들은 깨달았다. 규제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규제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규범을 고수하면 경쟁력이 약해진다. 경쟁력을 높이려면 규범의 실천을 미룰 수밖에 없다. 핵심은 이것이다. 규범의 보편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구현 시점과 절차에 대해 어떤 유예 규칙을 세울 것인가. 유럽이 최근에 한 일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정부는 AI산업 육성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한다. 동시에 개인정보 보호, AI 윤리, 플랫폼 공정성에선 높은 기준을 유지하려 한다. 다음달 시행될 AI 기본법에서 두 가치가 충돌한다. 정부는 모든 AI 서비스를 규제하지 않는다. 대신 생명·신체·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을 고영향 AI로 분류하기로 했다. 사업자 스스로 해당 여부를 판단해 위험 관리 방안을 수립해야 한다. 최종 책임은 기업에 있다. 나중에 고영향으로 판단되면 제재를 받는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자본이 부족한 스타트업은 의료, 금융 등 민감 영역에 진입할 유인이 줄어든다.
현행 개인정보보호법과 저작권법은 AI 학습을 사실상 가로막고 있다. 기업이 수집한 데이터를 AI 학습에 쓰려면 정보 주체에게 재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데이터 규모가 1만 건만 넘어도 개별 재동의를 받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국내에 수백 테라바이트(TB)의 공개 공공 데이터가 있지만 절반 이상은 AI 학습에 활용하지 못한다. 규범을 지킬 것인가, 혁신을 택할 것인가. 이런 이분법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에게도 길이 있다. AI 학습 단계에서는 개인 식별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하고, 공개 정보와 연구 목적 등에 대해 예외를 둘 수 있다. 고영향 AI 지정은 기준을 구체화하고, 스타트업 전용 간소화 체계를 도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규제를 무조건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규범을 실천할 방법을 다시 구조화하자는 것이다. 유럽이 보여준 자기모순. 그것은 한국에도 사고방식의 합리적·실용적 전환을 요구한다. 규범과 경쟁력을 양립시킬 유예 규칙. 그것을 설계하지 못하면 한국엔 강력한 규제와 텅 빈 시장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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