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일이 안 풀릴 때 나는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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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일이 안 풀릴 때 나는 달린다

달력의 마지막 장, 12월이다. 모두가 한 해의 성과를 결산하느라 분주한 시기다. 나 역시 차분히 지난 1년을 되돌아본다.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을 꼽자면 제주 트레일러닝 70㎞ 코스 완주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나는 3㎞도 헉헉대며 겨우 뛰던 평범한 중년이었다. “우버 택시 타면 될 걸 왜 힘들게 뛰냐”며 러너들에게 농담 섞인 핀잔을 주던 내가, 산을 넘고 들을 지나 70㎞를 완주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회사의 대표가 도대체 언제 뛸 시간이 있냐고. 하지만 내가 달리지 않았다면, 과연 올 한 해를 온전한 정신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나를 지탱해 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스트레스에 의연해졌고, 자신감을 회복했으며, 고통 속에서도 긍정을 발견하는 눈을 뜨게 됐다.

달리기는 최고의 디톡스다. 리더의 자리에선 실체 없는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턱끝까지 차오를 때 달리면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흐르는 땀과 함께 머릿속을 오염시키던 걱정이란 독소가 배출된다. 샤워 후 찾아오는 멍한 명상의 시간, 그 ‘마음의 샤워’를 하고 나면 태산 같던 문제들이 비로소 작아 보인다.

통제 가능한 성취감은 단단한 자신감을 심어줬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투성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외부 변수 때문에 결과가 어그러질 때 사람은 무력해진다. 하지만 달리기는 다르다.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건 내 몸뿐이다. 달리기는 정직하다. 내가 움직인 만큼 나아가고, 땀 흘린 만큼 기록은 단축된다. 요행이 통하지 않는 이 정직한 성취감은 내게 ‘노력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존감을 선물했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고통을 성장의 재료로 바꾸는 ‘의미 부여’의 힘을 얻었다. 장거리 레이스에는 반드시 한계점이 온다. 나에게는 30㎞ 구간이 그렇다.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완주를 가능하게 하는 건 오직 의미 부여뿐이다. ‘이 오르막만 넘으면 시원한 콜라를 마시리라’라고 의미를 입혀야만 무거운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 인생도 경영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꽃길은 없다. 회사에서 마주하는 가시밭길을 ‘지옥’으로 볼 것인가, ‘그릇을 키우는 기회’로 볼 것인가. 의미 부여의 힘 덕분에 나는 힘든 상황을 태연히 넘길 수 있는 마음의 맷집을 얻었다.

올해는 참 다사다난했다. 하지만 냉정히 보면 내년의 세상이 더 고요하거나 안정적일 것 같지는 않다.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그럴수록 외부의 안정이 아니라 내면의 단단함이 필요하다. 파도를 막을 수는 없지만,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중심을 잡을 수는 있다. 나는 내년에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을 것이다. 그것이 거친 파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다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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