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네이버지회(공동성명)는 최근 네이버랩스와 크림 단체교섭 과정에서 '네이버 본사'를 기준으로 교섭에 임하고 있다. "처우 유사성이 높은 네이버·스노우·네이버제트에서 수년간 노사가 합의해 운영해 온 협약안을 기준으로 교섭을 시작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공동성명 측 교섭위원들은 네이버랩스·크림 구성원들이 다른 네이버 계열 법인들보다 낮은 처우를 받아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IPX 단체교섭에서도 이와 유사한 흐름이 나타났다. 공동성명은 노사 간 논의를 거쳐 단체협약 조항 중 약 90%를 라인플러스 수준에 맞췄다고 강조했다.
IT 업계 '판교 모델' 확산…노사 교섭 '초기업화'
16일 노동계에 따르면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주요 정보기술(IT) 기업 노조들은 법인별로 단체교섭을 진행하면서도 사실상 본사와 유사한 수준의 합의안을 끌어내는 초기업적 성격의 교섭 관행을 보이는 게 특징이다. 화섬식품노조를 중심으로 조직된 '통합지회'가 계열사 교섭을 주도하면서 이 같은 관행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일각에선 이를 '판교 모델'로 규정했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달 공개된 간행물을 통해 판교 모델의 동향과 한계, 과제를 분석했다. 박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IT 산업 노사관계는 초기업적 현실과 산업 표준의 강화라는 공고화 신호와, 사용자성·책임 구조의 공백 및 내부 이질성의 증폭이란 위기 신호가 동시에 관찰된다"고 설명했다.
판교 모델이란 '통합지회' 기반의 초기업적 조직화 형태를 갖춘 노조가 법인별 교섭 정보를 공유하면서 공동 의제를 제시하는 IT 산업 특유의 노사관계 방식을 가리킨다. 네이버 노조인 공동성명이 다른 계열사 단체교섭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이를 주도하며 공통된 처우 보장을 관철시키는 형태가 대표적이다.
판교 모델이 자리를 잡게 된 요인으로는 IT 업계 내 잦은 인력 이동이 꼽힌다. 계열사·자회사 간 이동도 적지 않다. 직무·기술 중심으로 경력이 쌓이는 구조라 기업 간 경계가 제조업 등 전통적 산업만큼 강력하지 않다. IT 산업 종사자들이 직무·기술·산업 단위로 정체성과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배경이다.
이들 기업이 판교·분당 지역에 밀집된 지역적 특성도 영향을 미쳤다. 같은 업종이 한 지역을 중심으로 모인 탓에 공식 교섭 창구 외의 '비공식 네트워크'가 만만찮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를 통해 기업·산업 내부 경험이 빠르게 확산된다. 이 과정에서 기업별 교섭이 '산업형 교섭'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네이버·카카오 등 주요 IT 노조들이 '통합지회' 형태를 채택하면서 판교 모델이 뿌리를 내렸다. 다수의 계열사·자회사·손자회사를 한 지회가 포괄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법인 구조는 분절돼 있지만 업무 지휘, 인사 정책, 예산 구조가 그룹 차원으로 결합된 만큼 이에 대응하려는 취지다.
노사 간 교섭 방식 '겉과 속' 달라…협상 결과 '연동'
실제 교섭 작동 방식을 보면 겉과 속이 다른 점이 눈에 띈다. 겉으로 보면 법인별 교섭 형태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법인 간 경계를 넘어 교섭 관련 정보를 공유하면서 공통된 의제를 제안하는 과정이 일상화됐다. 다른 법인 교섭 결과와 비교·연동하는 방식으로 같은 계열 안에서 기준선을 마련하는 식이다.
이 구조는 산업 전반으로 확장되는데 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가 핵심 축이 된다. IT위원회는 지회 간 교류에서 그치지 않고 제도적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정례회의를 열어 교섭 현황, 분쟁 경험, 사용자 대응 전략 등을 공유하면서 정보 풀을 구축했다. 교섭을 개별 기업의 내부 경험으로 방치하지 않고 IT 산업 전체가 공유하는 학습 결과로 만든 것이다. 포괄임금제 폐지, 직장 내 괴롭힘 방지, 복지 기준 같은 요구를 산업 차원의 공통 의제로 끌어올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판교 모델이 가장 안정적으로 정착한 곳은 네이버다. 통합지회 중심의 교섭이 자리를 잡았을 뿐 아니라 실제 성과도 만들어내는 중이다.
하지만 판교 모델은 최근 시험대에 올랐다. '교섭 상대의 불확실성'이 대표적인 한계로 꼽힌다. 그룹·본사의 영향력이 크다고 하지만 교섭 책임은 법인별로 쪼개진 상태다.
네이버 손자회사나 운영법인들 사이에서 임금·단체교섭이 연이어 결렬되고 공동행동이 전개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공동성명은 지난해 "네이버가 손자회사인 6개 법인 대표 인사권 등 실질적 지배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임금교섭에선 책임 지지 않으려 한다"면서 연 200만~600만원 수준의 인센티브의 연봉 산입과 '본사 대비 합리적 연봉 인상률'을 요구하기도 했다.
예컨대 계열사 교섭에서 노조 측이 개별 기업 단위를 넘어서는 요구할 경우 회사는 '그룹·본사 방침과 다르다'거나 '예산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등의 어려움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예산 배분, 인력 규모, 보상 총액, 핵심 인사 정책, 사업 방향 등은 그룹 차원의 전략·통제에 따라 결정되지만 단체교섭 책임은 개별 법인이 짊어지는 구조가 형성되는 셈.
이는 노사 간 갈등 해결을 구조적으로 지연시키고 누적되도록 만드는 결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책임 소재가 그만큼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오플 성과급 논란에 판교 모델 '휘청'…"제도적 틀 필요"
통합지회 내부 구성원 간 '이질성'도 판교 모델을 흔든다. 넥슨·네오플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넥슨·네오플 사례는 게임업계 노사관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갈등 양상으로 치달았다. 네오플은 대표 IP가 장기간 흥행을 이어가면서 넥슨 그룹 내 고수익 법인으로 우뚝섰다. 노사 교섭장에선 자연스럽게 이 같은 성과를 어떻게 배분할지가 쟁점이 됐다.
문제는 그룹 내 다른 법인들과의 격차에서 비롯됐다. 네오플 소속 조합원들이 요구한 성과 보상이 그룹 전체 교섭에서 노조 측 협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 네오플 조합원들이 과도한 성과 보상을 요구하면서 전체 교섭 구조가 흔들려 연대에 균열이 생겼다는 분석이다. 네이버·카카오를 포함한 여타 IT 기업들을 보더라도 본사의 경우 전체 직원 1인당 평균 급여액이 1억원대에 이르지만 손자회사로 내려갈수록 근로조건이나 처우가 큰 격차를 보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기업들 입장에선 판교 모델이 골치거리일 수밖에 없다. 개별 기업마다 사정이 다른데도 근로조건과 처우, 복지 기준을 동일한 수준으로 맞춰달라는 노조 측 요구를 매번 맞딱뜨려야 한다. 법인별로 경영 여건이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상향 평준화' 압력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꼴이다.
노조 측 정보 공유가 경영 기밀이나 기업 전략이 유출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기업 인사·보상·조직 개편 등의 내부 정보가 외부로 노출될 우려가 커지는 측면이 존재한다.
한 인사노무 업계 관계자는 "모든 회사가 같은 속도로 성장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경영 상황도 제각각인데 교섭이 다른 법인이나 타 기업과 연동되기 시작하면 교섭 자체도 난항을 겪기 쉽고, 모두가 업계 최상의 조건만을 기준으로 삼게 돼 경영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면서도 "교섭이 초기업적으로 작동된다면 불확실성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그에 맞는 제도적 틀이 함께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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