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설]‘카더라’ 온상 된 블라인드, 다시 직장인 대나무숲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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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이설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10여 년 전 그 인물들이 어디로 갔나 싶을 때가 있다. 눈치 제로 ‘캔디’, 사사건건 ‘NO 맨’ 등 개성이 뚜렷했는데 지금은 모두 둥글둥글하다. 자존심이 긁혀도 10분 만에 털어내고, 선 넘는 질문은 웃음으로 넘길 줄 안다. 밥벌이의 소중함과 무서움을 시간이 깨우쳐 준 결과다.

특히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내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따른다. 건전한 비판이 악의적 비방으로 오해받거나 감정 다툼으로 번질 위험 때문이다. 2013년 생긴 ‘블라인드’는 이 지점을 겨냥해 고속 성장했다. 회사 메일로 인증만 거치면 신원이 철저히 감춰지는 이 익명 공간에서, 직장인들은 인사 불이익이나 2차 가해의 공포에서 벗어나 사내 갑질과 성비위 사건을 털어놓았다.

빛이 강한 만큼 그늘도 짙다. 글로벌 누적 가입자 1000만 명을 넘어서며 악용 사례도 늘고 있다. 직장 내 허위 불륜설 유포, 경찰 계정 사칭 ‘살인 예고’, 이름 초성을 딴 삼행시 저격, 허위 비방으로 인한 입사 취소 등 알려진 사건만 해도 적지 않다. 퇴사자 계정을 구매하거나 휴직자 계정을 도용해 커뮤니티를 교란하기도 한다. 법적 대응을 포기한 이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 규모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말고’ 식 비방글이 넘쳐나는 이유는 추적과 적발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창업한 ‘팀 블라인드’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두고 있다. 가입자 정보는 특허 기술로 암호화돼 서버에 저장되지 않는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도 ‘서버에 가입자 정보가 없어 협조가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온다.

블라인드는 ‘임시 조치(즉시 게시 중단)’ 의무에서도 비켜나 있다. 정보통신망법상 국내 포털은 명예훼손 신고 즉시 30일간 글을 가려야(임시 조치) 한다. 해외 사업자인 블라인드는 신고 누적 건수가 쌓여야만 글이 가려지는 자체 시스템에 의존한다. 그 사이 화면 캡처본이 사내외로 퍼지며 초기 피해 진압은 요원해진다.

드물게 혐의가 밝혀진 경우도 있다. 피의자를 좁힐 단서와 기업의 수사 협조가 맞아떨어지면 피해 사실을 입증할 가능성이 커진다. 문제는 ‘내부자 인증’이 신뢰를 더하면서 대부분 저격글이 사실처럼 소비된다는 점이다. 허위 불륜 사건 피해자는 “2년 전 자극적인 내용의 ‘찌라시’에 다들 열광했는데, 허위 사실이라는 기사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시민사회와 학계는 다각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임시 조치를 해외 플랫폼에도 적용하고 기업의 수사 협조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물건이 안전하게 배송되면 예치금을 판매자에게 건네는 ‘에스크로 결제’ 방식을 접속 로그에 대입한 대책도 거론된다. 국민권익위원회 조사 결과 익명 앱 사이버 폭력 피해자 절반이 대응 방법을 모르는 것으로 나타난 만큼, 대처 요령을 안내하는 시스템 마련도 시급하다. 블라인드는 한국 직장인 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국내 시가총액 상위 1000대 기업 소속 직원들의 블라인드 가입률은 91%에 달한다. 글로벌 진출도 활발하고 코스닥 상장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 고발과 건강한 공론장이라는 핵심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악성 블라인드 워리어’를 퇴치할 정교한 보완책을 모색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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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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