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조건희]졸업앨범서 도려낸 아이, 정말 친구를 위한 건가

5 hours ago 1

조건희 사회부 차장

조건희 사회부 차장
운동장에 서서 장난스러운 손짓을 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2장이 있다. 한 사진에는 5명이지만, 다른 사진에는 4명뿐이다. 한 아이의 모습이 그림자까지 통째로 지워졌다. 배경의 울타리와 나무, 바닥의 모래까지 정교하게 복원해 아이가 서 있던 빈자리를 컴퓨터 그래픽 작업으로 메운 결과물이다.

2023년 10월 학교 폭력을 호소하다 숨진 부산의 한 초등학교 6학년 조모 양의 이야기다. 이듬해 2월 동급생 60여 명이 받은 졸업앨범에서 조 양의 사진은 지워졌다. 유족에게는 ‘특별한 배려’라면서 조 양이 포함된 앨범을 따로 건넸다. 학교 측은 다른 학생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지만, 유족은 “피해자의 흔적을 지우는 2차 가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올 5월 인권위는 ‘인권 침해로 단정하긴 어렵다’며 기각했다.

그런데 인권위는 특별히 기각 결정(2348자)보다 더 긴 2772자 분량의 검토 의견을 달고 학교 측의 대응이 부실했음을 지적했다. 졸업앨범은 공식 기록물이자 학생의 추억을 담는 상징적 자료인데, 이를 별도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도 없었고 유족에게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인권위는 “사망한 학생을 추도하고 애도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갖는 건 학생의 정서적 회복과 공동체적 치유에도 의미가 있다”며 부산시교육청에도 관련 지침을 갖출 것을 권고했다.

이례적으로 긴 의견을 단 이유가 궁금했다. 부산인권사무소의 담당 조사관은 “진정서를 접수한 뒤 학교 측의 대응이 적절했는지, 관련 매뉴얼은 있는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며 “‘기각’이라는 한마디로 끝내면 안 된다고 판단해 다소 긴 의견을 달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학생을 무사히 졸업시키는 것이 국가의 역할인데, 앞으로도 사망 등 여러 이유로 졸업하지 못하는 학생이 발생했을 때 일선 학교가 참고할 기준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미국 자살예방재단(AFSP)과 자살예방자원센터(SPRC)의 ‘학교를 위한 자살 사후 대응서’에 따르면 사망 학생을 졸업앨범에서 일방적으로 제외하는 건 금기다. 회피성 대처는 남은 학생의 트라우마를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숨진 학생의 사진 아래 사망 연도를 병기하고, 필요하면 “너를 기억하며, 우리는 정신건강 문제와 자살을 둘러싼 편견을 없애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문구를 넣기를 권고한다.

지난해 전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중고교생은 243명이다. 2021년 197명 이후 매년 늘고 있다. 그런데 교육부의 ‘학교 위기 대응 지침’은 여전히 사건 직후의 단기 심리 지원에만 머물러 있다. 명확한 지침이 없으니 학교는 ‘친구들을 위해서’라며 회의록도 남기지 않은 채 사진 속 아이를 도려내고, 어머니는 딸의 액자를 들고 연단에 올라 혼자 졸업식을 치른다. 이제는 우리도 유족과 남은 친구를 모두 치유하기 위한 제대로 된 작별 방식을 논의해야 한다.

광화문에서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 사설

  • 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

    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

  • 게임 인더스트리

    게임 인더스트리

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