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반도체는 있다, 전기는 있는가

1 week ago 8

[기고] 반도체는 있다, 전기는 있는가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눈에 띈다. 인공지능(AI) 기업들이 전력회사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 앤스로픽은 자사 데이터센터 때문에 지역 전기요금이 오르지 않도록 송전망 개선 비용을 100% 직접 부담한다고 발표했다. AI가 만든 전력 비용을 사회에 전가하지 않고, 기업이 내재화하겠다는 선언이다. 오픈AI 역시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통해 모델 개발을 넘어 발전·송전·저장 인프라까지 포함한 전력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소프트웨어 기업이던 AI 회사들이 이제는 전력망, 변압기, 냉각 시스템을 이야기한다.

실리콘밸리에서 AI 창업자, 데이터센터 관계자, 투자자와 이야기하다 보면 대화는 종종 같은 질문으로 끝난다. “그래서 전기는 어디서 가져올 건가?” AI 경쟁의 축이 바뀌고 있다. AI는 디지털 산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막대한 전력과 냉각 시스템, 송배전망 위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인프라 산업에 가깝다. 스탠퍼드 후버연구소가 지난 12일 주최한 ‘시장 대 규제(Markets vs. Mandates) 2026 컨퍼런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질문은, 그렇다면 “AI 시대 필요한 에너지를 어떻게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하게 공급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실제로 작동하는가”였다. 그 답의 중심에는 시장과 기업가정신이 있었다.

미국에서 시장 메커니즘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자유시장 철학 때문만이 아니다. AI처럼 변화 속도가 빠른 산업에서는 정부가 정답을 미리 설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로널드 코스는 외부 비용이 규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봤다. 재산권이 명확하고 이해관계자가 협력할 구조가 갖춰지면, 시장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인센티브 설계에 있다.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원자력발전과 청정에너지에 세액공제를 부여하자, 민간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다.

이미 빅테크는 행동에 나섰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오래전 사고로 폐쇄된 스리마일섬 원전을 향후 20년간 835MW 규모로 재가동하기로 했고, 아마존은 서스퀘하나 원전 인접 데이터캠퍼스에 탄소 없는 전력을 공급받는 전력구매계약(PPA)을 맺었다. 구글은 세계 최초로 복수의 차세대 소형모듈원전(SMR)에서 전력을 사들일 예정이다. 이들이 체결한 계약이 수십 년 단위라는 사실은, AI 전력 수요가 일시적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임을 보여준다. 데이터센터는 이제 IT 자산이 아니라 에너지 자산이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도 분명하다.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배터리·제조 역량을 갖추고 있다. AI 시대 경쟁력은 기술만으로 결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칩을 움직일 전기, 그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인프라, 그리고 이를 작동하게 할 시장을 설계하는 능력에서 나올 것이다. 기술 혁신의 속도만큼, 누가 더 빠르게 에너지 중심의 산업 질서를 확립하느냐가 승부를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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