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동 흔들려도 우리 전력망이 흔들리지 않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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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중동 흔들려도 우리 전력망이 흔들리지 않는 비결

항해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연료 고갈이다. 아무리 뛰어난 배라도 엔진을 돌릴 기름이 떨어지면 망망대해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반대로 충분한 비상 연료를 확보한 배는 어떤 풍랑 속에서도 항해를 이어갈 수 있다. 최근 중동 지역 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출렁이면서 우리 경제의 ‘연료통’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배에는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는 원자력이 버티고 있다.

일각에서는 “원자력도 우라늄을 수입하니 에너지 안보에 취약하다”, “국산 에너지로 보기 어렵다”라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에너지 안보를 단순히 ‘자원의 자급 여부’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에너지 안보의 핵심은 ‘필요할 때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 기준에서 보면 원자력의 장점은 확실하다. 원전은 한 번 연료를 장전하면 계획예방정비를 할 때까지 약 18개월간 쉼 없이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수시로 연료를 도입해야 하는 석유, 액화천연가스(LNG)와 다르다.

우라늄은 에너지 밀도가 매우 높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핵연료 팰릿 하나(5.2g)가 4인 가정이 반년 동안 쓸 수 있는 전력량인 1800kWh를 생산하게 한다. 이 전력량을 생산하려면 유연탄은 630㎏, LNG는 330㎏을 연소해야 한다. 그래서 우라늄은 비축이 쉽다. 우리나라는 통상 30개월분의 핵연료를 비축하고 있다. 지속적인 수입과 대규모 저장시설이 필요한 화석연료와는 차원이 다르다. 수입이 차단되더라도 30개월을 버틸 수 있는 이 ‘시간적 완충지대’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공급망에서도 차이가 있다. 석유와 LNG는 중동 의존도가 높은 데다 주요 수송로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항시 노출돼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발간한 ‘2024 에너지통계연보’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93.9%, 수입액은 1714억달러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는 72%, 천연가스는 30% 수준이다.

반면 우라늄은 호주, 캐나다, 카자흐스탄 등 비교적 안정적인 국가에서 수입한다. 공급처도 다변화했다. 연료를 수입하지 않으면 에너지 안보가 보장되는 걸까. 실제 태양광과 풍력은 연료 수입이 필요 없고 탄소 배출도 적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는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순간이 아니라 자연조건이 허락할 때만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 이 치명적 간헐성을 보완할 에너지저장장치 역시 경제성과 확장성 측면에서 아직 제약이 많다. 바로 이 한계를 메워주는 가장 현실적인 에너지원이 원자력이다.

에너지 안보는 구호만으로 확보할 수 없다. 공급의 연속성, 비축 능력, 공급망 안정성이라는 기준에서 판단해야 한다. 원자력은 이 세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한다. 18개월 연속 운전, 30개월분 연료 비축, 다변화한 공급망이 그 근거다. 미리 채워둔 비상 연료가 배의 운명을 결정하듯, 원자력은 에너지 위기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대한민국호를 지키는 든든한 비상 연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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