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페인 출장길에 우연히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앞을 지났다. 평일 낮인데도 경기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상기돼 있었다. 성지를 찾은 순례자의 표정이 저렇겠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아, 벌써 4년이 지났네…’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축구는 유럽인들의 ‘원픽’ 스포츠이자 가장 강력한 소비 콘텐츠다. 북중미 월드컵이 열리자 유럽도 들썩이고 있다. 기업들은 공식 개막 전부터 유니폼 판매에 나섰고, 국가대표 유니폼과 선수 이름이 새겨진 레플리카 판매도 급증했다.
유럽 거대 소비시장 흔드는 축구
월드컵은 가전업계에도 대목이다. “축구는 큰 화면으로 봐야지”라는 명분에 대형 TV 판매가 대회마다 증가한다. 승패와 관계없이 맥주와 스낵 매출은 대체로 승리한다. 최근에는 건강을 중시하는 젊은 층을 겨냥한 무알코올 맥주가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여행업계도 마찬가지다. 이번 월드컵은 북중미 대륙에서 개최됐지만, 유럽에서 대회가 열리면 개최 도시들은 마법처럼 다른 나라로 변신한다. 국경이 가까워 외국 팬들의 방문이 쉽기 때문이다. 팬들은 도시를 소비한다. 호텔에 묵고, 식당에 가고, 기념품을 산다. 월드컵은 거대한 관광 박람회에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유럽 각국 축구 문화가 소비 패턴에도 반영된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축구 스타일만큼이나 돈 쓰는 방식도 나라마다 다르다. 영국 프리미어리그(EPL)는 축구의 세계화에 가장 성공한 사례다. 세계 최대 규모의 중계권 시장을 구축하며 아시아와 북미, 중동에서 막대한 수익을 거둔다. 그 덕에 런던과 맨체스터의 구단은 글로벌 브랜드가 됐다. 과거 지역 주민의 문화였던 영국 축구가 이제 세계인이 소비하는 대표 문화 콘텐츠로 변모한 것이다.
스페인 라리가는 축구에 숙박·외식 소비를 끌어들이는 관광산업에 가깝다. 세계 각국 팬들은 경기가 없어도 구장 투어를 위해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찾는다. 매출 규모는 EPL의 절반 수준이지만, 라리가는 스페인 국내총생산(GDP)의 1.44%를 차지할 정도로 경제 파급효과가 크다. 축구가 경기장 안에서 끝나지 않고 도시 전체의 소비를 움직이는 셈이다.
세리에A의 이탈리아는 축구와 패션의 경계가 희미하다. 대부분 유니폼을 단순한 응원복이 아니라 일상복처럼 소비한다. 밀라노 거리에서는 경기장이 아니라 카페와 쇼핑가에서도 구단 유니폼을 쉽게 볼 수 있다. AC밀란과 유벤투스 같은 구단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와 콜라보 에디션을 꾸준히 선보인다. 이탈리아에서 축구는 스포츠이면서 동시에 라이프스타일이다.
나라별 축구문화, 소비방식 갈라
분데스리가의 독일은 가족 중심 여가문화로 발전해 다양한 생활용품 판매로 이어진다. 입장권이 저렴하고 관람 환경도 안전해 부모와 자녀가 함께 경기장을 찾는 사례가 많다. 경기장 주변에서는 팀 로고가 새겨진 모자와 텀블러, 학용품 등을 판매한다. 독일 축구는 90분 경기 관람에 가족 나들이의 성격까지 더해진다.
영국은 축구를 수출했고, 스페인은 관광으로 키웠다. 이탈리아는 라이프스타일로, 독일은 가족 여가문화로 발전시켰다. 방식은 달라도 소비의 본질은 비슷하다. 축구가 지갑을 여는 강력한 콘텐츠라는 점이다. 월드컵이 다가올수록 이런 소비 패턴은 더욱 뚜렷해진다. 경기는 90분이면 끝나지만 소비는 훨씬 오래 이어진다.
김연재 KOTRA 유럽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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