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가 위기라고요? 못 믿겠습니다. 한국 관객부터 감독, 배우들을 보면 수준이 높습니다. 창작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을 받은 일본 영화 '여행과 나날'의 미야케 쇼 감독은 한국 영화계의 위기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미야케 감독의 격려와는 달리, 국내 영화계가 직면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최근 몇 년간 일본과 한국의 영화 산업 흐름은 뚜렷하게 다른 방향을 보인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초청작은 일본에서만 6편이 선정된 반면, 한국 장편영화는 한 작품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일본 영화계는 독립영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감독층이 성장하며 창작 기반이 확장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이 여전히 봉준호, 박찬욱에 열광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이런 독립영화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물결이 자리 잡으며 세대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야케 쇼(1984년생)를 비롯해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하마구치 류스케(1978년생), '슈퍼 해피 포에버' 이가라시 고헤이(1983년생) 등 젊은 감독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점도 눈에 띈다.
미야케 감독은 한경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역시 관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미니시어터(독립예술영화관)와 아트하우스 상영관들이 버티며 다양한 영화를 지켜주고 있고, 그것이 새로운 창작자를 낳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일본은 2010년대 후반 상업영화 부진이 이어졌지만, 팬데믹 이후 완만하지만 회복하는 분위기다. 반면 한국 영화계는 시장 위축, 투자 감소, 제작 편수 감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위기감이 깊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일본 국내 관객 수와 박스오피스 매출은 2021년 이후 꾸준히 상승했고, 애니메이션 흥행이 회복세를 이끄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된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시리즈를 시작으로 '극장판 주술회전', '극장판 체인소맨' 등 일본 애니메이션이 잇따라 흥행에 성공하며 시장 전체를 견인했다. 일본 콘텐츠가 한국 극장가에서도 강세를 보이는 현상 역시 이러한 반전 흐름을 보여주는 지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앞선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한국 박스오피스에도 파고들었다. 그동안 한국 극장의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자국 영화 점유율을 흔들 정도로 흥행을 이어가며, 일본 콘텐츠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애니메이션만 선전한 것도 아니다. 미야케 쇼 감독의 '여행과 나날'은 해외 유수 영화제 노미네이트에 잇따라 이름을 올렸고, 주연을 맡은 배우 심은경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일본 실사영화도 재도약의 조짐을 보였다. 특히 일본에서 천만 관객을 모으며 실화 영화 중 역대 박스오피스 1위가 된 재일교포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한국에서도 입소문이 난 상황이다. 그룹 아라시 멤버 니노미야 카즈나리 주연의 '8번 출구'는 올해 국내 개봉 일본 실사영화 중 흥행 1위에 올랐고, 출연진이 세 차례 내한해 감사 인사를 전하는 등 열풍을 입증했다.
◆ "내년은 더 텅 빈다"
한국 영화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개봉 라인업이 빈약하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업계에서는 "2026년이 더욱 큰 보릿고개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현재까지 2026년 설 연휴 개봉이 예정 작품은 유해진 주연의 '왕과 사는 남자',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 정도다. 플러스엠의 '프로젝트 Y'도 2026년 1월 개봉을 예정하고 있으나, 전체 라인업을 채우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이처럼 극장가가 비어 가는 가장 큰 원인으로는 관객 이탈이 꼽힌다. 코로나19 시기에 인상된 극장 티켓 가격이 정상화되지 않은 데다, 관객들은 OTT와의 비교 속에서 극장 선택을 더욱 주저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진흥위원회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여름 극장 할인권이 배포됐을 때 관객 수가 평소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격이 극장 관람의 주요 진입 장벽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성공한 영화조차 수익성이 낮아지고 있다는 데 있다. 천만 영화 '파묘'는 객단가 하락으로 티켓 1장당 제작사가 가져가는 금액이 3797원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흥행에도 불구하고 제작사 손익이 악화되는 구조적 문제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티켓 가격 인상 → 관객 감소 → 제작사 몫 축소라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이다.
◆ 다양성 붕괴된 영화 생태계…2026년의 향배는?
한국 영화계가 "비슷한 영화만 반복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투자와 배급이 위험 회피에 집중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할 여력이 줄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신선한 장르나 새로운 스토리를 실험할 자본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영화 제작은 투자자·창작자·제작사·극장·플랫폼 사업자가 복합적으로 얽혀 돌아가는 구조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이 구조가 동시에 흔들리면서 중소규모 영화와 독립예술영화가 극장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한국은 독립영화 제작 편수로는 세계 상위권이지만, 실제 관객에게 도달하는 작품 수는 매우 적어 '기형적 생태계'라는 평가도 제기된다. 새로운 감독들이 성장하기도 쉽지 않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영화진흥위원회는 2026년 중예산 영화 제작 지원안을 발표했다. 순제작비 20억~100억 원 규모 작품에 최대 25억 원 또는 제작비의 40%까지 지원하고, 신인 감독 쿼터(30% 이상), 국제 공동제작 쿼터(20% 이내)를 신설하는 등 창작 저변 확대를 위한 조치를 내놨다.
하지만 업계 일각에서는 "중예산 중심 지원만으로는 시장 전체의 체력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다양성 확보가 시장의 지속성을 좌우하는데, 블록버스터·중예산·독립영화가 균형 있게 공존해야 생태계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해외에서도 다양한 규모의 작품을 동시에 육성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쥬만지' 후속편, '히트 2', 다니엘 콴 감독 신작 등 장르와 스케일이 다른 작품들을 대상으로 총 3억4200만 달러 규모의 세액공제를 지원하며 시장 확대를 유도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 생태계의 경쟁력은 특정 영역이 아니라 전체 포트폴리오의 다양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 영화에도 장르·규모를 가리지 않고 창작과 투자가 순환할 수 있는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내년이 한국 영화 산업의 분수령"이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현재의 침체가 지속된다면 극장 중심 산업 구조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국 영화가 다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재정 지원 확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분석이 많다. 영화발전기금 정상화, 독립·예술영화 인프라 확충, 지역 영화제 지원 복원, 실험적 프로젝트에 대한 장기 투자 등 "생태계 전반을 복원하는 구조적 개편"이 필요하다는 데 업계 의견이 모인다.
미야케 쇼 감독이 말했듯 한국 창작자들의 역량 자체는 여전히 견고하다. 문제는 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생태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2026년이 한국 영화가 다시 반등할 기회가 될지, 아니면 위기의 문턱이 될지는 향후 1~2년의 선택에 달려 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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