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모험을 할 것인가, 파티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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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모험을 할 것인가, 파티를 할 것인가

2011년 중반 SK그룹이 하이닉스 인수전에 뛰어들었을 당시 그룹 수뇌부는 매일 격론을 벌였다. 3조원 안팎의 거액을 들여 굳이 ‘위험한 회사’를 사야 하느냐가 논쟁의 요지였다. 특히 인수 주체인 SK텔레콤에서 반대 목소리가 거셌다. “잘 벌어오는 기업들이 있는데 굳이 왜 변동성이 높고,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한 회사를 인수하냐”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당시 SK텔레콤은 국내에서 현금 흐름이 가장 뛰어난 기업이었다. 그런데 그 돈을 가지고 주주나 임직원에 대한 보상을 늘리는 게 아니라 툭하면 적자를 내는 회사를 사겠다니. 직원들은 동요했고, 외국인 주주들도 반발했다.

하이닉스는 이처럼 미덥지 못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불황의 한복판에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 최대 특허 괴물의 공격도 받았다. SK그룹 수뇌부는 그런데도 모험을 택했다.

그 선택의 결과는 모두 아는 대로다. 15년이 지난 지금 SK하이닉스는 메모리 초호황에 힘입어 글로벌 빅테크 반열에 오르게 됐다. 하지만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C 등 황금알을 낳던 SK그룹 주력 계열사들은 그사이 산업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예전의 위상을 잃었다. SK그룹이 기존 시장 지배력과 현금 창출력에 안주했더라면 지금 그룹 전체가 흔들렸을 것이다.

SK와 같은 성공 사례는 의외로 드물다. 시장 지배력이 큰 기업일수록, 돈을 많이 버는 기업일수록 변화를 주저하거나 새로운 흐름을 무시하다가 추락하는 사례가 많다. 휴대폰 세계 1위였던 노키아와 필름산업의 맹주였던 코닥 같은 기업들 말이다. 블랙베리와 야후도 그런 범주에 있다. 이들 기업이 쇠락한 가장 큰 이유는 ‘사업이 너무 잘돼서’다.

공교롭게도 이들 기업이 추락한 것은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한 2010~2015년 즈음이다. 이 시기 전 세계 주요 기업은 두 가지 변화에 직면했다. 우선 모바일 혁신으로 초연결사회가 태동하고 딥러닝을 통해 인공지능(AI) 산업이 발아했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다른 한쪽에선 주주자본주의가 부상했다. 행동주의 펀드와 사모펀드가 커지고 전문경영인, 기술 임원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주주, 임직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기업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거대한 산업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자본 지출(CAPEX)을 확대할 것인지, 아니면 주당순이익(EPS)을 늘려 배당과 성과급에 쓸 것인지.

CAPEX와 EPS의 갈림길에서 서로 엇갈린 대표적 사례가 미국의 인텔과 대만의 TSMC다. 두 회사는 파운드리 분야에서 경쟁 관계였다. 중앙처리장치(CPU) 독점으로 막대한 현금을 창출한 인텔은 EPS에 방점을 뒀다. 2010년 전후부터 주주환원 차원에서 매년 수백억달러어치 자사주를 사들였다. 한 블로거는 “인텔이 파티를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비슷한 시기 TSMC는 첨단 공정 투자에 수백억달러를 쏟아부었다. TSMC도 임직원과 주주에 대한 보상을 꾸준히 늘려나가긴 했지만, 최우선은 CAPEX였다. 그 몇 년의 차이가 두 회사의 운명을 갈랐다. 인텔이 뒤늦게 파운드리 부문 투자를 늘렸지만, TSMC는 이미 닿을 수 없을 만큼 앞서가 있었다.

지금 전 세계 주요 기업은 CAPEX와 EPS 사이의 선택을 더 거세게 강요받고 있다. 산업 변화 속도는 한층 빨라졌고 시계는 불투명해졌다. 그만큼 더 많은 투자를 요구한다. 그러는 사이 한쪽에선 주주, 노동계를 비롯한 이해당사자들이 더 많은 이익 환원을 압박하고 있다. 올해 미국과 중국, 일본의 경쟁사들은 주저 없이 CAPEX를 택했다. 연초부터 경쟁하듯 전례 없는 수준의 투자 계획을 내놨다. 특히 미국 빅테크들의 투자 규모는 시장 예상치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 때문에 EPS 전망치가 뚝 떨어졌고 올해 1분기에 주가가 일제히 급락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빅테크들은 지금 모험할 때라고 외친다.

이제 돈을 한창 벌기 시작한 한국 대기업들도 그 기로에 놓여 있다. 사상 초유의 파업이 임박한 삼성전자의 모습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세계 1위 메모리 라인이 멈출지 모른다는 사실에 전 세계 산업계와 투자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모험을 할 것인가, 파티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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