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렵다. 올해 1% 성장도 힘겨운 상황이다. 코스피지수는 4000을 넘었지만 실물 경제는 사실상 성장을 멈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 위기를 돌파할 기업가정신이 절실한 시점이다. 서거 38주기를 맞는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이 새삼 떠오르는 이유다.
호암의 사업보국론(事業報國論)은 한국 현실에서 특별한 울림을 갖는다. 1976년 발표한 ‘나의 경영론’에서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내가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도 흔들림이 없다”고 역설했다. 모든 것은 나라가 근본이다. 나라 운명이 개인 운명보다 우선한다는 국명승인명(國命勝人命) 원칙을 평생 관철했다. 기업을 통해 국가와 민족에 기여한다는 믿음이 삼성 발전과 한국 경제 성장의 토대가 됐다. 기업가정신의 표상이 됐다.
인재제일주의가 오늘의 삼성을 있게 했다. “나는 인생의 80%를 인재를 모으고 교육하는 데 보냈다.” “기업은 사람이고 인재 육성은 기업의 본업이다.” 호암이 남긴 명언이다.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의심 가면 쓰지 말고 일단 쓰면 믿으라”는 신뢰 경영이 인재의 삼성을 견인했다. 뛰어난 전문경영인 다수가 배출됐다. 비서실의 소병해, 이학수, 최지성, 삼성전자의 강진구, 윤종용, 황창규 등이 대표적이다. 기업은 최고경영자(CEO) 그릇만큼 큰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실천했다. 기업을 이끄는 장(將)의 그릇은 병(兵)의 그릇과 다르다고 봤다. 저울을 다는 사람과 전표를 쓰는 사람은 다르다는 표현은 압권이다.
비학벌주의는 삼성 인사를 관통하는 철칙이다. 반드시 SKY 출신만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학연, 지연, 혈연을 배제하고 능력과 실적에 따른 공정한 인사가 이뤄졌다. 한종희 삼성전자(인하대), 허태학 에버랜드(경상대), 김순택 구조조정본부장(경북대)이 CEO가 될 수 있었던 건 비학벌주의의 산물이다. 공채와 외부 인사 채용을 균형 있게 추구했다. 기술 인력을 중시해 삼성전자가 세계 정상의 기술 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글, 애플 같은 기술 기업이 미국의 성장을 견인하는 것을 보면 호암의 선견지명을 알 수 있다.
삼성 사관학교라는 말처럼 인재 양성의 보고다. 삼성 출신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삼성맨은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가 형성돼 있다. CEO에게 시대 흐름, 대내외 여건 등을 공부할 것을 주문했다. 시대 변화에 뒤처지지 않는 여시구진(與時俱進) 자세를 요구했다. “사장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질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 출장길에 한 보따리씩 책을 구입해 임원들에게 나눠줬다.
제일주의는 호암의 또다른 신념이다. 최고 인재를 거느리고 있다는 자부심이 제일주의를 추동했다. 제일모직, 제일제당 등 명칭에서 ‘일등’ 지향성을 느낄 수 있다. 제일주의는 결국 완벽주의로 연결된다. “삼성이 만들면 표준이 된다”는 광고는 제일주의의 자연스러운 발로다. 공채 제도 도입은 최고 인재를 영입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삼성 비서실은 한국은행, 경제기획원, 재무부와 함께 최고의 인재 집단이었다.
합리 경영도 빼놓을 수 없다. “회사를 부실하게 경영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같다”며 흑자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호암은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잘 포착했다. 1973년 1차 석유 위기가 발생하자 조선산업 진출을 포기했다. 1983년 반도체산업 진출을 선언한 것은 위대한 결단이었다. 대한민국 명운을 좌우한 쾌거였다. 앞을 내다보는 과감한 투자, 그것은 미래에 대한 성찰의 산물이었다. 그러면서도 기업 역량에 걸맞은 성장 전략을 추구함으로써 무리한 사세 확장을 경계했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인식해 과욕은 금물이라는 절제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신용처럼 잃기 쉬운 것이 없다. 신용이란 기업에 대한 국민의 신뢰나 다름없다”며 정도 경영의 대의를 중시했다. 호암이 인의를 강조한 논어(論語)를 즐겨 읽은 소이도 여기에 있다.
저성장과 양극화가 우리 사회를 분노의 장으로 내몰고 있다. 글로벌 질서가 요동치고 자국 우선주의가 힘을 얻고 있다. 국가 위기에서 호암의 결단력과 통찰력 및 절제의 리더십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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