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행동론 대가 제임스 마치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의 얘기대로 주변 환경이 편하면 새로운 탐색을 멈춘다. 등 따시면 현실에 안주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생물학 분야 석학인 스티븐 제이 굴드 하버드대 교수도 경쟁 없는 환경에 놓인 생물은 수백만 년간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진화경제학 개척자인 리처드 넬슨 컬럼비아대 교수 역시 온실 속 존재는 관행의 노예가 돼 눈먼 돈 챙기기에 급급하다고 지적했다.
월드스타 없는 한국 금융계
세 석학의 이론을 한국 금융에 적용하면 거의 들어맞는다.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는 국내 프로야구처럼 시중은행은 매년 최대 이익을 경신하지만 좁은 내수시장에서 번 게 대부분이다. 글로벌 사업을 키우긴 했으나 해외 순이익 비중은 전체의 10% 남짓이다. 글로벌 순이익 비중이 절반에 가까운 일본 대형 은행과는 비교할 수 없다.
구성원 몸값은 어떤가. 국제대회 메달 수는 일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데 연봉은 일본의 두 배 이상인 여자 프로배구나 국내 은행의 현주소는 오십보백보다. 글로벌급 은행이 한 곳도 없는데도 한국 은행원의 임금은 일본의 갑절이다.
편하게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으니 굳이 무리해 해외로 나갈 유인이 없다. 온실 밖에서 살아남으려면 현지 텃세와 숱한 위기를 이겨내야 한다. 피나는 노력과 인내가 요구되지만 ‘안방 스타’는 세파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중도 포기한다.
온실 속 화초인 한국 금융회사도 비슷했다. 글로벌 스타가 즐비한 선진국 시장보다 안정적인 동남아시아에 집중했다. 어느 은행 할 것 없이 판박이다. 베트남이 좋다고 하니 모두 베트남으로 가고 최근엔 인도가 괜찮다고 하니 너나 할 것 없이 인도로 몰린다.
나가기 힘들게 만드는 울타리
국내에선 수익성 좋은 부동산 담보대출에 집착했다. 글로벌 은행을 불편하게 하는 한국식 금융 규제는 국내 은행의 천수답식 영업을 보장해주는 울타리를 만들어 줬다. 금산분리는 글로벌 기업의 진입을 막았고, 망 분리와 데이터 현지화는 글로벌 은행의 한국 철수를 부추겼다. 해외 용병이라도 뛰는 국내 스포츠 리그와 달리 한국형 규제가 만든 온실 속에서 국내 은행만의 과점 체제는 더욱 견고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적 금융과 포용 금융이란 숙제가 던져졌다. 잘나가거나 될 성싶은 기업을 지원하고 취약계층을 도우라는 얘기다. 국가 면허 사업이란 명분으로 각종 혜택을 받고 있으니 사회적 역할을 하는 건 당연하다는 압박이 따라붙는다. 평시엔 예금자 보호를 받고 위기 땐 구제금융이란 특혜를 받는 만큼 정부 요구에 응하는 것은 마땅한 사회적 계약 이행이라는 논리도 더해졌다. 금융은 자수성가해야 할 산업이라기보다 정부 아젠다에 맞장구쳐주는 ‘준공공기관’이란 인식의 발로다.
말 잘 듣는 금융인들은 잔인함과 약탈이란 뭇매를 피하기 위해 정부 정책에 적극 호응할 수밖에 없다. 이미 금융당국은 회초리를 들었고 은행들은 경쟁적으로 생산적 금융 이벤트를 열어 포용 금융 상품을 쏟아내고 있다. 이는 가뜩이나 모험을 싫어하는 국내 은행에 글로벌 사업을 후순위로 돌릴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전가의 보도였던 ‘금융의 삼성전자’와 ‘한국형 골드만삭스’는 한동안 빛바랜 구호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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