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역대급 투표율에도 무투표 당선 510명
대표성-책임성 약화시키는 양당 기득권 구조
선거제도 개혁 발판 삼아 개헌 논의 나서야
결과와 별개로 이번 지방선거는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되묻게 한다. 61%라는 역대급 투표율 이면에 무려 510명의 지방의회 후보자가 무투표로 당선된 당황스러운 현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시민이 주권을 위임하는 핵심 절차인 투표 없이 선출직 공직자가 결정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의 대표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무투표 당선 선거구 유권자들은 누가 어떤 정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는지 모른 채 후보자 수가 의석수 이하이므로 투표 없이 당선된다는 간략한 통지만 받았을 뿐이다. 전체 지방의회 당선자의 13%가 무투표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지방의원 8명 중 1명 이상이 민주적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공직에 오른다는 뜻이다. 더구나 전체 무투표 당선자의 43%가 수도권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문제의 원인이 거대 양당이 선거구를 잘게 쪼개 권력을 나눠 갖는 ‘카르텔 정치’와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대표성이 훼손되면 민주적 책임성도 약해진다. 민주적 책임성은 공직자가 유권자에게 공약을 제시하고, 당선 이후 그 이행 여부와 성과에 따라 다음 선거에서 평가받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그러나 무투표로 당선된 지방의원들은 시민의 대표로 자리매김하기보다 공천권을 쥔 정당과 지역구 국회의원의 당파적 충성파로 행동할 유인이 크다. 그래야 다음에도 공천을 받을 수 있고, 향후 중앙정치 무대인 국회로 진출할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실제 22대 국회의원 가운데 약 20%가 지방의회 출신이다.
대표성과 책임성은 대의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두 개의 메커니즘이다. 이 메커니즘이 취약해진 한국 민주주의에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다음 번 전국 단위 선거인 총선까지 아직 2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선거가 임박하면 정당 지도부와 정치인들은 눈앞의 정치적 손익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단기적 이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향후 2년은 한국 민주주의가 강건히 작동하게 하는 정치개혁에 몰두할 수 있는 시기다.지금 정치개혁이 절실한 또 하나의 이유는 지난 20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가 퇴행과 회복을 반복하며 깊게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퇴행의 상처’는 사회 곳곳에 새겨지며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지난 30년 동안 민주주의 후퇴를 경험한 뒤 다시 회복한 20여 개 국가는 공통적으로 그 상처를 잘 치유하지 못했고, 결국 또다시 민주주의 후퇴를 반복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016∼17년 6개월 동안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1700만 ‘촛불 시민’이 퇴행하던 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고 열광했다. 그러나 불과 7년 뒤, 우리는 민주주의가 하룻밤 사이 전복될 뻔한 아찔한 경험을 했다.
퇴행의 시기에 만들어진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한국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개혁은 비례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선거제도 개혁에서 출발해야 한다. 소선거구 단순다수제를 중심으로 한 현행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승자독식 규칙에 기반한다. 이 제도가 과도한 사표를 낳고 거대 양당의 기득권 구조를 영속화한다는 비판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지금 선거제도 개혁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승자독식 규칙이 거대 양당 정치인들의 사생결단식 경쟁을 부추기고, 정치 양극화를 심화시키며, 극단적 소수가 정치를 주도해 결국 민주주의 퇴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선거제도 개혁은 제왕적 대통령제로 비판받아 온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개헌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국회의장과 집권 여당이 주도한 올해 상반기 개헌 시도는 좌절됐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급히 추진한 것이 실패의 한 원인이다. 개헌을 성공시키려면 여야와 국민 다수가 폭넓게 합의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의제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추진 시점과 방법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개헌은 대개 정치적으로 중요한 ‘중대 국면’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년이면 민주화 40주년이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반복된 퇴행의 상처를 치유할 정치개혁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멀리 보고 크게 생각하는 정치 리더십이 정부와 국회에 자리 잡아야 한다. 향후 2년이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중대 국면’이 되기를 소망한다.정재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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