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로리~." 일상에서 황당하거나 극적인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흔히 쓰는 옛 유행어가 글로벌 K팝 시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코드로 부상했다. 신인 걸그룹의 파격적인 타이틀곡부터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 중인 톱아티스트의 신보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고전 클래식 선율이나 한 시대를 풍미한 팝 명곡을 음악적 전면에 배치하는 사례가 급증하는 추세다.
이는 단순한 복고풍 유행이나 멜로디 고갈에 따른 고육지책이 아니다. 음악 소비의 중심축이 15초 내외의 숏폼 콘텐츠로 완전히 이동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리스너들의 청각적 진입 장벽을 즉각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한 정교한 산업적 생존 전략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바흐와 힙합의 파격적 만남…가요계로 번진 '샘플링' 바람
더블랙레이블의 신인 걸그룹 미야오는 최근 발매한 'DDI RO RI(띠로리)'를 통해 클래식 음악의 거장 바흐의 대표작 '토카타와 푸가 D단조'를 전면으로 재해석한 클래식 힙합을 선보였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장난스레 읊조리던 웅장하고 장려한 오르간 도입부 선율 위에 세련되고 묵직한 트랩 비트를 얹어 극적인 음악적 대비를 이뤄낸 것이다. 특히 원곡의 선율 자체를 직관적인 가사 "띠로리"로 치환해 후렴구에 배치함으로써 이른바 '수능금지곡'에 버금가는 강력한 중독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누구나 아는 명곡을 샘플링한다는 것은 신인 아티스트에게 큰 자산인 동시에 확고한 색깔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무거운 책임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멤버 엘라는 곡을 처음 접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어릴 때 친구들과 장난치며 부르던 멜로디라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면서도 "막상 멋진 비트와 섞었을 때 색다른 느낌이 들었고 신났다"고 말했다. 이어 "바흐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같이 춤을 출 것 같다"며 "이 노래가 처음에는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후에는 비트에 맞춰 함께 춤추지 않을까 싶다"고 말해 곡이 가진 반전 매력을 짚었다.
멤버 나린은 "처음 들었을 때는 모두에게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저희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면 이미 아는 노랜데 정말 다르다고 느낄 것 같았다"며 "아예 다른 노래로 느껴질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퍼포먼스로 재해석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명곡의 재소환은 미야오만의 행보가 아니다. 걸그룹 르세라핌은 정규 2집 타이틀곡 '붐팔라(BOOMPALA)'를 통해 1996년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 100'에서 14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글로벌 메가 히트곡 '마카레나'를 샘플링했다. 전 세계인에게 친숙한 리듬 위에 주문처럼 읊조리는 후렴구를 얹어 트렌디한 댄스곡을 완성했다.
멤버 사쿠라는 "'마카레나' 샘플링을 한 곡이라 '이거 될 거 같은데?'라는 확신을 느꼈다"며 이번 여름을 겨냥한 대표곡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홍은채 역시 "전 세계 분들이 잘 아는 노래라서 많은 분이 즐길 수 있겠다 싶었다"고 전해 글로벌 시장에서의 높은 접근성을 기대하게 했다.
르세라핌의 샘플링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들은 미국 서부 영화 '석양의 무법자' OST를 차용해 당당한 태도를 각인시켰던 정규 1집 '언포기븐(UNFORGIVEN)'부터, 김완선의 원곡을 재해석해 선배 아티스트를 향한 존경을 담았던 '삐에로(Pierrot)'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샘플링을 시도해 왔다. 원곡의 높은 대중성을 발판 삼아 팀이 전하고자 하는 서사를 새롭게 덧입히며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는 모양새다.
앞서 지난 4월에는 보이그룹 NCT 위시(NCT WISH)가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록밴드 크랜베리스의 명곡 '오드 투 마이 패밀리(Ode to My Family)'의 시그니처 멜로디 '뚜 뚜루뚜' 를 차용한 신곡 '오드 투 러브(Ode to Love)'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이러한 흐름은 과거 블랙핑크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를 접목해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켰던 '셧 다운(Shut Down)'이나, 레드벨벳이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섬세한 K팝 코드로 풀어내 호평을 받았던 '필 마이 리듬(Feel My Rhythm)'의 성공 플롯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 3초 안에 귀를 사로잡아라…숏폼 플랫폼이 강제한 생존 법칙
K팝 아티스트들이 전 세계가 기억하는 메가 히트곡이나 클래식 멜로디를 적극적으로 소환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대중에게 각인된 명곡의 킬링 파트를 차용하는 순간 음원 바이럴의 진입 장벽이 즉각적으로 완화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어서다.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유튜브 쇼츠 등 숏폼 비디오 플랫폼이 대중음악 흥행의 절대적인 지표로 자리 잡은 현시점에서 익숙한 멜로디는 그 자체로 강력한 마케팅 무기가 된다.
수많은 콘텐츠가 스크롤 한 번에 넘겨지는 환경 속에서 리스너가 영상을 넘기지 않고 머무르게 만드는 '골든 타임'은 단 3초에 불과하다.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이를 인지시키는 과정보다, 이미 뇌리에 박혀 있는 익숙한 킬링 파트를 노출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의미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콘텐츠 산업 전망 보고서: 숏폼 플랫폼과 음악 소비 트렌드의 변화'에 따르면 숏폼 비디오 플랫폼 이용자들의 음악 소비 흐름을 분석한 결과, 이용자들은 생소한 멜로디보다 과거에 한 번쯤 접해본 익숙한 음원이나 챌린지에 직관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리듬에 더 오랜 시간 체류하는 경향을 보였다.
해당 보고서는 대중에게 이미 각인된 명곡의 킬링 파트를 차용하는 순간, 이용자들이 콘텐츠를 인지하고 소비하는 주기가 비약적으로 단축된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신인 그룹이라 할지라도 검증된 멜로디를 무기로 내세운다면 전 세계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음원 확산 경쟁에서 한 발 앞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현대 유저들의 콘텐츠 소비 심리를 들여다보아도 학계의 분석은 이와 궤를 같이한다. 한국음악콘텐츠학회에 게재된 '숏폼 비디오 플랫폼 환경에서 K-Pop 바이럴 마케팅의 효과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현대 유저들은 과잉된 정보 속에서 최소한의 인지적 노력만을 기울이려는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 성향을 강하게 나타낸다.
연구진은 사용자가 숏폼 플랫폼을 이용할 때 낯선 신곡을 탐색하고 해석하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이미 친숙한 멜로디를 만났을 때 즉각적인 심리적 안정감과 쾌감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잘 만들어진 샘플링 음원은 유저들의 챌린지 참여율을 높이고, 나아가 실제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으로의 유입을 유도하는 가장 확실한 연결고리가 된다는 진단이다.
주목할 점은 최근 K팝 씬에서 나타나는 샘플링의 '방식'이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샘플링이 단순히 원곡의 특정 드럼 비트나 리듬 루프를 조용히 밑바탕에 까는 데 주력했다면, 최근의 신곡들은 원곡의 핵심 멜로디는 물론 가사와 상징성까지 통째로 전면에 내세우는 과감함을 보인다. 미야오의 '띠로리', NCT위시의 '뚜 뚜루뚜'와 같은 가사가 대표적인 예다. 원곡의 직관적인 선율이 아티스트의 구체적인 메시지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오늘날 K팝 아이돌의 클래식 및 글로벌 명곡 소환은 치열한 플랫폼 경쟁 속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라며 "멜로디의 친숙함이라는 확실한 카드 위에 팀 고유의 세계관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얹어내느냐에 따라 해당 음원이 시대를 초월한 웰메이드 트랙이 될지, 혹은 단발성 화제에 그치는 아류작이 될지가 판가름 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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