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식 법무부 국제법무국장
韓 정부 없던 ICC 판정 근거로 졌지만… 그 절차 허점을 파고들어 100% 승리
워싱턴·헤이그·런던… 13년 장기전… 배상액 2억1600만 달러에서 ‘제로’로
비상계엄 땐 국제 무대선 ‘신뢰 공격’… 공(功) 다툼보다 국제분쟁 역량 키워야
―이번 취소 결정, 한마디로 어떤 의미인가.
“말 그대로 완전 승소다. 2022년 시작된 중재 판정 전체가 사라졌다. 양쪽이 각자 패소한 부분을 동시에 취소해 달라고 신청한 이례적인 사건이었는데, 우리 신청만 받아들여졌다. 론스타가 이번에 이겼더라면 청구액이 다시 6조 원대까지 커질 수 있었다. 그런 ‘2차전’ 가능성이 사실상 닫혔다. 펜싱으로 치면, 상대가 얼굴을 향해 찌르는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우리가 가슴을 찔러 경기를 끝낸 꼴이다.”
―국제중재 전문가들은 어떻게 평가하나.
“원래 판정을 내렸던 3명, 이번에 판정을 취소한 3명 모두 국제중재계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사람들이다. 동료들이 10년 걸려 내린 판정을 뒤집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웠을 거다. 그럼에도 ‘이 정도 절차 위반이면 취소해야 한다’고 본 거다. 변호사들이 절차를 가볍게 보고, 온갖 기교를 쓰는 시도에는 더 이상 눈감지 않겠다는, 일종의 ‘반칙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강력한 ‘예방 주사’ 격이다.”―중대한 절차 위반이라고 본 핵심은 뭐였나.
“문제가 된 사건은 국제상업회의소(ICC) 산하 중재였다. 론스타와 하나금융, 민간 회사들끼리의 분쟁인데, 외환은행을 하나금융에 넘기는 과정에서 정당한 이유없이 금융위원회의 승인을 지연시키는 ‘부당한 압박’ 등 불공정 대우를 한국 정부에 당했다는 게 론스타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직접 증거나 증언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2022년 8월 ISDS 원 중재 판정부는 한정된 정보로 작성된 ICC 중재 판정문에 적힌 사실관계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한국 정부에 일부 책임이 있다며 론스타에 일부 승소 결정을 했다. 돈을 물어내야 하는 한국 정부는 정작 ICC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서, 거기서 나온 증인·문서에 대해 질문할 수도 없었고 반대신문도, 추가 증거 제출도 할 수 없었다. 쉽게 말해 한국 정부가 참여하지 못한 다른 민간 중재 사건에 담긴 내용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인 뒤, 론스타와 한국 정부의 ISDS 사건에 끌어다 쓴 셈이다. 당시 인수 가격 인하를 정부가 ‘사실상’ 압박했다는 언론 보도 등이 주요 근거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정부 설명이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3년 전 2억1600만 달러 배상액은 어떻게 나왔나.
“원 중재판정부는 금융위의 부당한 매각승인 지연과 가격인하 압박으로 론스타가 입은 손해를 약 4억3000만 달러로 산정했다. 그러나 론스타 주가조작도 금융위의 승인 지연을 야기한 공동 책임을 인정해 이 금액의 절반인 2억160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최종 판정한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주가조작으로 인해 금융위가 바로 결정을 못한 것이었으니 이것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중재인 구성은 어떻게 판을 갈랐다고 보나.곁에 있던 김지언 부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배심 재판에서 배심원 선정이 승패를 좌우하듯, 중재 사건에서는 중재인이 승패를 좌우한다. 보통 ISDS 사건의 중재판정부는 3인 체제다. 투자자와 국가가 한 명씩 중재인을 지명하고, 의장 격인 세 번째 중재인은 양측 합의나 기관 지정을 통해 선임한다. 로펌과 상의해 과거 판정문을 분석했고, 국가의 정책적 재량을 무겁게 보는 프랑스 국적의 브리짓 스턴을 우리 쪽 중재인으로 선임했다. 국제공법의 대가다. 그가 절차 위반을 강하게 지적하는 의견을 갖고 있는데, 이번 취소 신청의 핵심 논리로 더 발전시켰다.”
● 연극 팸플릿처럼 만든 ‘먹튀 설명서’
김 부장은 미국 워싱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구술심리를 두고 “2015, 2016년 4차례에 걸쳐 금융·조세·관할 등을 쟁점으로 강도 높은 심리를 열었다”며 “론스타와 우리 측 증인, 중재 측 인사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했다. ICSID가 있는 미 워싱턴 소재 세계은행 청사의 정식 심리실이 사건 규모에 비해 너무 좁았다. 결국 지하에 있는 1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어두운 회의실로 내려가서야 심리를 열 수 있었다고 했다.
―중재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했나.“론스타 사건은 한국인들도 이해하기 어렵다. 쉽게 설명하는 방안을 고민하다가 인물, 배역, 시나리오가 담겨 있는 ‘연극 팸플릿’을 떠올렸다. 중재인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인물과 론스타 사건에서 전현직 관료 등 주요 증인의 이름과 역할 등을 정리한 론스타 ‘팸플릿’을 만들었다. 중재인들이 ‘이게 어떤 Eat and Run(먹튀) 사건인지’ 직관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전략이었다.”
―투자조약에 나온 영어 단어도 쟁점이 됐다고 했는데….
“외환은행에 직접 투자한 주체는 텍사스에 있는 론스타 본사가 아니라, 론스타가 벨기에에 세운 특수목적법인들이었다. 론스타는 이 법인들이 ‘벨기에 국적’임을 앞세워 1976년 체결된 한-벨기에 투자협정을 근거로 ISDS를 제기했다. 이 협정에 ‘industry’라는 표현을 두고 양측이 충돌했다. 론스타는 ‘금융업도 industry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우리는 1976년 당시 한국 상황을 보면 industry는 ‘산업·공업’으로 보는 게 맞다고 봤다. 중재판정부도 한국 손을 들어줬다. 론스타와 다퉈야 하는 범위가 줄어든 것이다.”
● 계엄 정국, 국제무대에선 ‘신뢰 공격’ 당해올 1월 취소 구술 심리는 영국 런던에서 열렸다. 심리에 직접 참여했던 정 국장은 “유리한 곳에서 심리하기 위한 양측의 신경전 탓”이라고 했다. 론스타는 심리 장소로 미국 워싱턴을, 우리는 싱가포르를 원했다. 그러다가 제3의 장소인 런던이 선택됐다.
―그 당시 계엄 정국이 실제로 부담이 됐나.
“론스타와의 구술 심리가 열리기 바로 직전 주에 싱가포르에서 또 다른 ISDS 사건을 심리했다. 상대방 대리인이 ‘불과 한 달 전에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나라의 정부 결정을 믿을 수 있느냐’는 식으로 한국 정부를 공격하더라. 국내 정치 상황이 곧바로 국제무대에서 공격 소재가 된 셈이다. 국제 중재 무대가 얼마나 냉혹한지 실감했다. 비상계엄 정국이라 법무부에 장관도 없는 상황이었다. 1월 런던 특유의 축축하고 어두운 날씨까지 겹쳐 위축됐던 건 맞다.”
―런던 취소심리에서는 어떤 기류가 느껴졌나.
“론스타 측 주장은 변론도 짧게 듣고 질문도 많지 않은 느낌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집중적으로 파고든 ‘적법 절차 위반 부분’에 대해서는 위원들이 질문을 많이 했다. 특히 ‘한국 정부의 절차 위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는 전제 아래 3페이지 이내로 의견서를 내라고 할 때 깜짝 놀랐다. 이런 요청 자체가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선고 당일, 정부는 어떻게 움직였나.
“승소와 패소를 가정한 8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결정문이 오면 즉시 전파해 판결문을 분석하고 관계 부처 회의를 이어 가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법무부 국제투자분쟁과 이메일로 결정문이 왔다. 마지막 페이지의 전부 승소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뛰더라.”
―발표는 법무부 장관이 아니라 국무총리가 했다.
“처음 세운 계획은 법무부 장관이 결과를 발표하고, 우리가 그 뒤에 상세 브리핑을 하는 구도였다. 그런데 여러 부처가 이뤄낸 경사니 총리가 먼저 ‘정부 공식 입장’을 발표하고, 다음 날 법무부가 법적 의미와 세부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정리가 됐다. 그날 오후엔 결정이 안 나올 줄 알았다. 급히 캐비닛에 있던 여름 정장 상의를 꺼내 입고 바로 총리실 브리핑장으로 향했다.”
―승소 이후 정치권이 공을 다투고 있다.
“특정 정치인들을 언급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13년 동안 계속된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함께 만들어 낸 집단지성의 성취라고 본다. 정권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의사 결정은 합리적이었다. 로펌 변호사, 정부 변호사 역할을 맡은 검사들이 ‘뼈를 갈아 넣는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만큼 많이 뛰었다. 배임·횡령 같은 형사 사건에서 나온 사실관계를 잘 끄집어내 우리 쪽 반박 근거로 쓰는 작업도 중요했다.”
이 대목에서 김 부장은 “숟가락을 많이 얹으면 잔치는 커지는 법”이라며 “이번 기회에 한국의 ISDS 대응 역량을 점검하고 강화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론스타 측은 본질은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그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나.
“론스타가 2차 중재를 청구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이번에 기각된 95.4% 부분은 다시 다툴 수 없다. 우리는 조기 각하를 신청할 거다.”
―정책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나.
“장기전이다 보니 정치적 오해를 받고 공격받는 일도 생긴다. 이런 공격이 반복되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ISDS가 남발되는 경향도 있다. 선진국 중에선 한국이 제소를 많이 당한 편이다. 지금 한국에는 해상풍력 개발에만 100조 원대 해외 투자가 들어오고 있다. 향후에 분쟁이 더 많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정홍식 법무부 국제법무국장
△2006년∼현재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중재인 패널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 중재인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조정위원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 중재인 패널
장관석 논설위원 j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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