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두 시세로 열고 음악방송으로 닫고… 철탑으로 퍼진 조선 첫 라디오[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1 hour ago 2

1927년 ‘소리의 시대’ 맞은 경성
정동서 첫 방송 해 일상 파고들어… 8월 명창대회 열릴 때면 귀 쫑긋
조선-일본어 교대방송에 불만 커… 전쟁 격화 속 군국 선전방송 확산
해외 방송 비밀 청취하며 저항도

일제강점기 구세군사관학교 건물(현 서울 중구 정동 구세군역사박물관) 뒤로 보이는 조선 최초의 라디오방송국 경성방송국과 송신탑.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구세군사관학교 건물(현 서울 중구 정동 구세군역사박물관) 뒤로 보이는 조선 최초의 라디오방송국 경성방송국과 송신탑.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경성 라디오 방송의 빛과 그림자

1926년 말 동아일보에는 ‘옥상에서 바라본 경성의 팔방(八方)’이라는 연재 기사가 실렸다. 막 이전을 마친 새 사옥의 낙성(落成)을 기념해 동아일보사(현 일민미술관) 옥상에서 여덟 방향으로 바라본 시가지 풍경을 스케치한 기사였다.

4회차 기사에는 서남쪽 정동 일대를 이렇게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길게 빗긴 햇발이 짧은 겨울의 황혼을 또 재촉한다. 붉은 햇머리만 앙상한 나무가지에 혼몽하게 달렸는데 라디오 방송국의 괴물 같은 쇠기둥이 얼어붙은 듯이 정동 꼭대기에 솟아 있다.”(동아일보, 1926년 12월 19일) 정식 개국을 앞둔 경성방송국의 송신탑이 당시 정동에서 단연 눈에 띄는 시설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라디오 방송은 곧 아시아로 전파됐다. 일본은 1924년 도쿄방송국을 시작으로 1925년 초 오사카·나고야방송국을 차례로 설립했다. 국제통신연합이 일본에 부여한 국가 부호가 ‘JO’였기 때문에 방송국별 호출부호는 JOAK, JOBK, JOCK로 정해졌다. 같은 해 경성방송국 설립도 결정됐다. 호출부호는 자연히 JODK로 정해졌다. 부지를 정동 언덕으로 결정하고 공사를 시작한 것이 1925년 6월이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덕수초교 자리다.

일본에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 이미 1924년 말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공개 시험방송 행사를 열었을 때 “수신기가 설치된 3층 누상은 방청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매일신보, 1924년 12월 12일)

경성방송국이 조선 권번 기생의 노래와 연주를 중계하는 모습을 실은 매일신보.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경성방송국이 조선 권번 기생의 노래와 연주를 중계하는 모습을 실은 매일신보.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경성방송국 설립이 결정된 뒤 신문사들도 라디오 홍보 활동에 열을 올렸다. 1925년 말 조선일보사가 수신기를 구매해 영남 일대를 순회하며 도쿄 및 오사카, 중국 상하이에서 송출되는 방송을 들려주는 ‘라디오 순회대’ 행사를 열었고, 동아일보사도 두 달간 충청·호남 일대를 순회하며 관련 행사를 진행했다. 이런 열기에는 “순전히 우리 조선 사람의 손으로 방송국 같은 것을 경영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한이지만은 하여간 이런 신기한 과학의 발전이 우리의 가정에 습래하는 이때에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고 또 배워야겠다”는 민족적 실력 양성의 정서가 깔려 있었다.(조선일보, 1927년 1월 12일) 경성방송국은 1927년 2월 16일 역사적인 첫 방송을 송출했다. 방송은 오전 9시 반 ‘주식기미(株式期米·쌀 등의 선물거래인 미두 시세)’ 보도로 시작해 뉴스와 일기예보 등을 시간대별로 내보냈고, 오후 6시 이후에는 어린이 시간, 각종 강좌, 음악방송 등을 오후 9시 반까지 편성했다. 그러나 12시간 연속 방송이 아니라 10∼20분씩 방송한 뒤 중단했다가 다시 송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실제 하루 방송 시간은 6시간 30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하나의 채널로 조선어와 일본어를 번갈아 방송했다. 다만 조선어 방송의 비중은 30% 정도였다.

경성방송국이 수입해서 가정에 보급한 ‘보급형 1호 수신기’. 사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경성방송국이 수입해서 가정에 보급한 ‘보급형 1호 수신기’. 사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초기부터 청취자들의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은 음악방송이었다. 방송국 측도 이를 예상하고 최신 음향설비를 갖춘 방송실을 마련해 서양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거나 조선 권번 기생들의 잡가 공연, 장구·거문고 연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는 해마다 8월 수일간 전국 유명 명창을 하루에 한 명씩 방송국에 초청해 공연을 내보내는 명창대회였다. 1927년 제1회 대회에는 김추월, 이동백, 이화중선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창들이 출연해 조선인 청취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1937년)에선 주인공 윤직원이 “머리맡 연상(硯床) 우에 삼구(三球)짜리 라디오 한 세트를 매어두고 그걸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방송국의 마이크를 통해 오는 남도 소리며, 음율 가사 같은 것을 들”으며 “한 달에 1원씩 내면서 그 재미를 다 보니, 미상불 헐하기는 헐하다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실제로 명창 공연의 입장료가 10원 정도였다고 하니, 지독한 구두쇠인 윤직원에게 월 1원의 청취료를 내는 라디오는 “헐하기는 헐하다”고 여길 만했던 것이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 당시부터 방송지휘실에서 모니터용으로 사용된 철제 마그네틱 스피커. 사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 당시부터 방송지휘실에서 모니터용으로 사용된 철제 마그네틱 스피커. 사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그러나 조선어·일본어 교대 방송은 조선인 청취자들의 근본적인 불만 사항이었다. 당시 라디오는 초저가형도 10원 정도였고, 음질이 좋은 고급형은 수백 원에 이르는 고가의 장비였다. 이런 장비를 갖추고 청취료를 내면서도 조선인 청취자가 들을 만한 방송의 비중은 훨씬 낮아 불만이 생긴 것이다. 이는 청취자 확대의 장애 요인이 돼 방송국 측에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현 정동 덕수초교 교정에 있는 경성방송국 첫 방송터 기념비. 사진 출처 염복규 교수

현 정동 덕수초교 교정에 있는 경성방송국 첫 방송터 기념비. 사진 출처 염복규 교수
경성방송국은 시설을 확충해 조선어·일본어 이중방송(Two Channel)을 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방송소 부지를 물색한 끝에 경성 서쪽 교외인 고양군 연희면 서세교리에 1만7000여 평의 터를 확보했다. 도심과 달리 넓게 트여 있고 비교적 완만한 구릉지여서 전파 송출을 방해하는 요소가 적었다. 더구나 인근에는 1930년부터 가동을 시작한 당인리화력발전소가 있어 전기 공급도 용이했다. 여기에 발전소 준공과 함께 개통한 당인리선 철도(용산선 서강역∼당인리역)가 운행되고 있어 시내와의 교통 연결도 편리했다. 1932년 말 현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사거리 부근에 착공한 연희방송소는 이듬해 4월 26일 “각계 명사 4000여 명을 초청하여 이중방송 개시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1930년대 후반 일제 침략전쟁이 격화되면서 방송도 영향을 받았다. 1938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방송심의회가 설치되면서 방송 통제는 한층 강화됐다. 조선 징병제 실시 이후 ‘병역 준비 강좌’ 같은 시국방송의 비중이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음악방송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전과 달리 일본 군악대 연주회 중계가 많아졌고, ‘혈서 지원’ 같은 이른바 군국가요 방송도 늘었다. 서양음악 방송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국(樞軸國) 동맹이 강화되면서 오페라 아리아나 이탈리아 칸초네, 독일 민요 등의 비중이 현저히 높아졌다. 1942년에는 일본군이 점령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부터 현지 민요와 취주악을 중계 방송하기도 했다. ‘전파의 대동아공영권’을 과시하려 한 셈이다.

정반대의 사건도 일어났다. 1942년 11월 어느 날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형사들이 정동의 경성방송국과 연희방송소에 들이닥쳐 조선인 직원 여러 명을 체포해 갔다. 해외에서 발신된 단파방송을 몰래 들은 혐의였다. 방송국 직원에 이어 이들에게 정보를 얻은 지식인들까지 속속 잡혀 들어갔다. 체포된 관련자는 무려 150여 명에 달했다.

이 사건에 연루됐던 변호사 이인(1896∼1979·광복 후 초대 법무부 장관)은 조선총독부가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압수한 단파수신기를 국내 각 방송국에 분배하고 동경방송을 직접 수신하게 하여 국내에 방송토록 하였”는데 “이 단파기를 조작하던 경성방송국 한국인 기술자들이 비밀리에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과 ‘우리말 중경(임시정부의 근거지였던 중국 충칭) 방송’을 청취”한 데서 사건이 비롯됐다고 회고했다. 또 몰래 청취한 방송 가운데는 “이승만의 ‘국내 동포들에게 고함’이라는 격렬한 선동조의 방송”도 있었다고 했다.(이인선생수필논평 제2집, 1965년)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현재 이 사건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경성방송국 직원은 아나운서 2명, 기술직원 4명 등 모두 6명으로 확인된다. 한국 미디어 문화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경성방송국은 이처럼 일제의 전쟁 프로파간다와 그에 대한 저항이 교차하는 가운데 최후를 맞고 있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