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증자 코스닥기업 노려라”
1999년 7월 한국경제신문 투자 가이드 섹션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당시 유상증자는 주가 상승과 동의어였다. 터보테크 주가는 유증 공시 후 65% 넘게 올랐고, 골드뱅크는 유증 발표만으로 가격 제한폭까지 치솟았다. 할인율이 높았던 것도 이유였지만, 기본적으로 그 시절 투자자들은 유증을 ‘성장을 위한 실탄’으로 이해했다. 지금의 인공지능(AI)처럼 그때 막 열린 인터넷이란 신세계를 잡으려면 주머니가 넉넉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몇 년 뒤 ‘닷컴버블’이 터지기 전까지 말이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똑 부러진 실체도 없이 그저 ‘닷컴기업’이란 포장 하나로 돈을 끌어모은 수많은 기업이 소멸했다. 투자자 손에 남은 건 휴지조각이 된 주식증서뿐이었다. 이후에도 오너 지분율을 높이기 위한 ‘꼼수 증자’와 아무런 자구 노력 없이 툭하면 주주에게 손을 벌리는 ‘반복 증자’가 줄을 이으면서 유증은 어느 순간 한국 자본시장에서 금기어가 됐다.
신뢰를 무너뜨린 대가는 컸다. 투자자들이 ‘나쁜 증자’는 물론 미래 산업에 투자할 돈을 확보하기 위한 ‘좋은 증자’까지 깡그리 악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몇몇 기업이 투자자의 믿음을 저버린 기억은 아무 상관 없는 기업이 유증에 나설 때마다 소환됐다. 그러자 금융당국은 투자자 보호를 이유로 증권신고서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이런 압박을 버텨낼 기업이 얼마나 있겠는가. 기업이 투자자에게 “함께 미래를 사자”고 제안하는 자본시장의 기본 언어인 유증은 투자자 보호 강화란 금융당국의 ‘선의’에 밀려 사실상 실종 상태로 내몰렸다. AI, 로봇, 반도체, 배터리, 태양광 등 미래 산업은 죄다 ‘돈 먹는 하마’인데, 가장 싸고 빠르게 돈을 구할 수 있는 창구가 막힌 셈이다.
얼마 전 불거진 한화솔루션 유증에도 그런 측면이 있다. 경영을 잘 못 했든, 주력인 석유화학과 태양광의 동반 불황 때문이든 코너에 몰린 한화에 유증은 사실상 유일한 탈출구다. 2022년 140.8%이던 부채비율이 작년 말 196.3%로 상승한 상황에서 추가 차입은 안 그래도 ‘부정적 전망’ 꼬리표가 붙은 신용등급(AA-)을 끌어내리기 십상이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이자비용이 늘어나고 빚 상환 요구도 급증할 게 뻔하다. 미래 투자도 ‘급한 불’이긴 마찬가지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실리콘 셀보다 발전효율이 훨씬 높은 태양광 셀의 ‘게임체인저’ 페로브스카이트 탠덤 셀 투자를 늦추면 중국을 이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수 있으니까.
좋게 보면 상장기업이 위기를 딛고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자본시장을 활용하는 전형적인 사례지만, 금융당국이 두 차례나 반려한 걸 보면 빚을 갚기 위해 애꿎은 주주에게 손 벌린 대목이 모험자본 공급이란 자본시장 본연의 역할보다 더 크게 읽힌 모양이다.
기업이 자본시장을 활용해 미래 투자자금을 마련하고 사업구조를 재편하려다가 무산된 사례는 여럿 더 있다. 두산그룹은 두산에너빌리티 아래 있던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 자회사로 돌려 AI 스마트 머신 사업을 강화하는 큰 그림을 그렸지만, 주식 교환비율을 문제 삼은 당국의 압박에 철회했다. 상장으로 5000억원을 마련해 수요가 폭증하는 권선 공장을 미국에 지으려던 LS에식스솔루션즈의 계획은 모호한 중복 상장 이슈에 휘말려 없던 일이 됐다.
기업에 “돈 많이 벌어 주주환원을 늘리라”고 하면서 정작 성장에 필요한 자금 조달 통로는 막는 모순된 정책. 주가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는데 상장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돈 구하기 어려워진 기형적 상황. 코스피지수 8000 시대, 우리 기업들이 맞닥뜨린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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