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최근 국민성장펀드가 출시 10분 만에 완판됐다는 뉴스를 접했다. 코스피 시장의 훈풍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반가웠던 것은 자본의 물길이 미래 산업으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한 가지 묵직한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우리 금융은 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을까.
서구 자본주의는 지난 300년에 걸쳐 금융과 함께 진화해왔다. 처음에는 땅과 금 같은 눈에 보이는 유형 자산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들을 거치며 금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까지 품기 시작했다. 국가의 신용을 거래하는 국채가 등장했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업의 미래에 투자하는 주식시장이 성장했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알고리즘·데이터·플랫폼 같은 무형자산 위에서 움직인다.
그 결과 미국 S&P500 기업 가치의 무려 92%가 무형자산에서 나온다. 50년 전인 1975년에 17%에 불과했던 수치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이제 세계 경제는 보이지 않는 가치 위에서 움직인다. 금융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자산으로 인정하고 자본의 물길을 열어주었기에, 비로소 혁신은 시장 안에서 거대한 주류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은 서구가 수백년에 걸쳐 축적한 산업화와 금융 발전의 시간을 50년 만에 압축했다. 선진국의 설계도를 빠르게 도입해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그러나 그 눈부신 압축 성장 그늘 아래서 끝내 성숙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보이지 않는 가치에 투자할 수 있는 금융 시스템과 사회적 인식이다. 대한민국 산업은 미래로 달려왔지만, 금융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산업화 시대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금융은 여전히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부동산, 공장 같은 유형 자산에는 자금이 손쉽게 몰리지만, 데이터·소프트웨어(SW)·콘텐츠·인공지능(AI) 기술 같은 무형자산 앞에서는 한없이 인색하다. 특허 담보대출과 기술금융 제도가 존재하지만, 실제 시장에서의 활용은 아직 제한적이다. 무형자산을 제대로 평가하고 금융화할 수 있는 체계까지 고려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AI 시대의 핵심 기업들은 공장 없이 성장한다. 직원 수보다 데이터가, 생산설비보다 알고리즘이 기업 가치를 결정한다. 따라서 여전히 공장과 부동산 같은 유형 자산 중심으로 움직이는 금융 구조로는 미래 산업의 성장을 뒷받침하기 어렵다.
결국 금융은 단순한 자금 중개를 넘어 국가의 미래 방향을 결정하는 인프라다. 어떤 산업에 자본이 공급되고 어떤 기술에 투자가 집중되는가가 결국 그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의 금융이 대한민국의 양적 성장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생산적 금융'이 대한민국을 선도형 혁신국가로 이끌 새로운 엔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변화가 시급하다.
첫째, 무형자산 평가 체계의 고도화다. 데이터·SW·지식재산 같은 무형자산이 금융 시스템 안에서 정당한 담보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둘째, 장기 모험자본이 성장할 수 있는 시장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혁신 기업은 단기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단기 수익만 좇는 금융 구조로는 AI 시대의 거대한 혁신 기업을 키워낼 수 없다. 셋째, 시민들의 투자 인식 전환이다. 이제 금융은 더 이상 기관만의 영역이 아니다. 선도국의 국민은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 미래 산업의 주주이자 든든한 투자자로 참여한다. 이번 국민성장펀드 완판은 그 인식 변화의 소중한 첫걸음이다.
선도국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미래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실패의 시간을 견디며, 아직 증명되지 않은 가능성에 기꺼이 자본을 댈 수 있는 사회 위에서 완성된다. 자본의 물길을 미래 산업으로 돌리는 것. 그것이 넥스트 거버넌스의 핵심 과제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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