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관청에서 웅어를 특별관리한 이유[김창일의 갯마을 탐구]〈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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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교 아래를 거닐었으나, 겸재 정선이 봤다는 풍경은 온데간데없다. 정선은 1740년부터 5년간 양천현령을 지내며 한강과 주변 명승지를 그린 ‘경교명승첩’을 남겼다. 그중에 행주산성 부근 행호의 풍경을 그린 ‘행호관어도’가 있다. 그림에는 행주산성 주변 풍경과 14척의 웅어잡이배가 담겨 있다. 당시 웅어잡이 중심지는 한강과 창릉천이 만나는 행호였다. ‘행호관어도’에 실려 있는 이병연의 시에도 행호에서의 웅어잡이 장면이 묘사돼 있다. “늦봄에는 복엇국/초여름에는 웅어회라/복사꽃 가득 떠내려오면/행호에 그물질 바쁘네.” 위어(웅어)와 소어(밴댕이)의 공급을 위해 사옹원에 ‘위어소’와 ‘소어소’를 뒀다. 고양, 교하, 김포, 통진, 양천에 위어소를 설치했는데, 행주나루(양천)에 있던 위어소가 가장 번창했다. 궁중에서는 위어소에서 보낸 웅어를 받아 회로 먹거나 젓갈을 담갔다. 위어소 소속의 어부는 300호 정도였다. 웅어잡이 어부에게는 병역과 각종 부역을 면제해 주고 토지 8결씩을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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